[번역] 장애인을 위한 새로운 희망①

 

 

 

 

나는 할로란 종합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하반신 장애자인 존 크라운이다. 내 육체적 상처는 정신적 상처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다. 죽을 고비를 넘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세상으로 돌아와 있는 것이다. 독재로부터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한 위대한 전쟁이었던 2차 세계 대전에 참가했고 이 목적을 위해서 함께 싸우다 죽어간 동료들을 지켜 보아야 했던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나 이 나라에서도 평화를 발견할 수가 없다.

My name is John Crown. I am a paraplegia at Halloran General Hospital. My physical wounds are very small in comparison with very spiritual wounds. I have come back from death to a world that I no longer care for. I, who have been engaged in the great struggle to save the world from tyranny and having seen my comrades die for this cause, can new find no peace in the world or in my country.

지난 2년을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 오면서 이 세상에 왜 평화가 없는가를 생각해 왔다. 그 이유란 너무나도 사소하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다다넬즈 해협을 차지하려고 하고, 유고슬로비아는 트리에스트란 땅덩어리를 차지하려고 하고, 모슬렘(회교도)은 인도를 차지하려고 하고 있으며, 노동자는 더 많은 임금을 원하고, 자본가는 더 많은 이윤을 원하고, 스미스란 사람은 자기 앞에 있는 차가 어서 지나가 주기를 바라며, 젊은이는 돈을 더 많이 쓰고 싶어한다. 이런 하찮은 대가를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불구로 만들어야 하는지 묻고 싶다.

Having lived close to death for two years, the reasons why there is no peace seem infinitesimally flimsy. Russia wants the Dardanelles, Yugoslavia wands Trieste, the Moslems want India, labor wants more wages, capitol wants more profit, Smith wants to pass the car in front of him, Junior wants more spending money. To these, I say, is it necessary to kill and cripple human beings for these petty gains?

사람의 몸이 땅 한 덩어리이나 돈 몇 푼, 또는 몇 분의 시간을 위해서 남은 생애 동안을 밤낮으로 내야 하는 죽어 가는 듯한 신음 소리를 들으며 살아야 할 만큼 값싼 것인지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Anyone who thinks a human body is so cheap that it can be traded for a tract of land, a piece of silver, or a few minutes of time should be forced to listen to the moans of the dying night and day for the rest of his life.

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은 보통 사람들에게서 비롯된다. 나라들 사이의 이기적이고 욕심 사나운 습성은 각 개인들의 습성이 수 백배로 증폭된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도덕이 떨어질 때 국가나 세상의 도덕도 떨어지는 법이다.

All the troubles of the world originate in the common man. The selfish and greedy ways of nations are just the ways of each individual man multiplied a hundredfold. When the morals of the common man drop, so do the morals of the nation arid of the world.

각 개인들의 도덕이 쇠퇴기에 머물어 있는 한 이 세상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 각자가 자기 차로 도로를 독점하려고 싸우고, 버스에서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고, 서로 반박을 일삼는 논쟁을 그치지 않는 한, 세상에는 평화란 없을 것이다. 인류가 평화를 다시 바란다면 가장 큰 계명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As long as our individual morals remain 9t low ebb, so will be the world. Until each of us stops "hogging the road" wish his car, stops fighting over the seat on the bus, stops arguing over why is going to cut the grass, there will be no peace in the world. If man wishes peace again, he must return to the great Commandment, "Love thy neighbor as thyself for the love of God."

위의 글은 1946년 10월 20일자 뉴욕 타임즈에 난 할로란 종합 병원에 입원 중인 상이 용사, 존 크라운의 견해이다. 발행 후 한 주일 동안 많은 편지와 전화를 받으며, 존 크라운이 누구냐? 그 밖에도 또 쓴 것이 있느냐? 그에 대해 좀더 말해 줄 수 있느냐?는 질문도 받았다.

The Above, printed without comment in The New York Times on October 20, 1946, were the views of John Crown, a disabled veteran who was a patient at Halloran Hospital. In the week after its publication, many letters were received, as well as many telephone calls, asking, "Who is John Crown? Has he written anything else? Can you tell me more about him?"

존 크라운은 1942년, 직장을 그만 두고 입대했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전쟁 중, 홀란디아(인도네시아의 북동부 항구 코터바루의 옛 지명:역주)에서 지프 차 사고로 척추를 다쳐서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2년 동안을 병상에 갇힌 채, 생각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여러 달 동안을 고통스런 자기 분석을 행한 노력 끝에 "자신이 느낀 대로 표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John Crown was one of the men who left his job in 1942 to enter the Army. During the war, his back was broken in a jeep accident in Hollandia, and he was paralyzed from the waist down. In the two years he was confined to bed in a hospital, he was unable to do much but think, and after months of painful, soul-searching effort, he was able to express "how he felt."

이 이야기는 그가 행한 바에 대한 이야기다. 할로란 병원에 누워 있던 그 해 겨울, 우리가 똑같은 네 벽만을 바라보면서 2년을 보낸 후에 가지게 될 인생에 대해 그 같은 성찰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휠체어나 병상에서, 또는 최선의 경우 클러치를 짚고 사는 존재가 되어서 우리 다리에 힘도 감각도 없이 인생을 명상하게 된다면 우리 대부분이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로 인해서 자신의 과도한 장애의 충격에 소멸되었을 것 같았던 그에게 삶에 대한 열망과 동기부여의 불꽃이 일어나 의사와 재활 전문가들이 존과 꾸준히 재활 과정을 수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 

This is the story of how he did it. that winter, while he tar in Halloran Hospital, he ?ad the same outlook on life that you and I might have after spending two years looking at the same four walls- the outlook most of us would have if we were without power or sensation in our legs, and contemplated life in a wheel chair or hospital bed or, at best, a "crutch life" existence. The doctors and rehabilitation specialists had worked diligently with John, but the spark of ambition and motivation in him seemed to have been extinguished by the overpowering impact of his disability.

같은 장애로 고생하고 있는 쟈니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가 힘없는 다리에 교정기(braces)를 부착한 채 클러치를 짚고서 길고 지루한 걸음마 연습을 하는 것을 보면서 진정한 인내를 배우게 되었다. 쟈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서 많은 사람들이 병원을 떠나갔다. 그 사람들은 심한 장애에도 가능한 보통 사람들처럼 살려고 의지가 있었지만 쟈니에게는 그런 의지의 불꽃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단지 그건 시간 문제에 불과했다. 그는 70 파운드(31.5kg)의 몸무게로 시작했다.

Other men in the ward with Johnny, who suffered the same disability, had learned by sheer fortitude and long, tedious hours of training to walk on crutches, with their powerless limbs held rigid by braces. Many came to tell Johnny good-by as they left the hospital. Severely disabled physically, ther had the will to live as much like other men as Possible, but the spark in Johnny did not kindle. His weight fell to seventy pounds; it seemed to he merely a matter of time.

어느 날 적십자의 봉사자인 그레이 부인은 쟈니와 일상적인 차트를 기록하다가, 병원을 떠나 집으로 간 사람들, 부루클린에 있는 쟈니의 집, 그리고 쟈니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는 "내가 전에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는 것을 아시죠. 마비 상태가 작가가 되는 데 불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셨죠. 그래서 당신은 말해야 할 것을 생각할 수 있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죠."라고 말했다. 그 부인은 그가 무엇이든 써보라고 했지만, 쟈니는 머리를 흔들며 "고등학교 때 작가가 되었으면 했었지만, 그러지 못했어요."라며 대답했다.

One day, a Red Cross Gray Lady stopped for her daily chat with Johnny. They talked about the men who had left the ward to go home, about Johnny's home in Brooklyn, and about Johnny himself."You know," he said, "I was thinking the other day I wish I were a writer. Being paralyzed wouldn't be so bad if you were a writer. You could just think up things to say, and then say them."The lady asked if he had done any writing, but Johnny shook his read. "No, when I Was in high school I thought once I would like to write, but I never did," he answered.

그러나 그 부인은 그에게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 날 저녁, 쟈니는 [재향 군인 작가 동우회](Veterans Authors' Workshop)의 설립자인 헨리에타 샤론을 만났다. 그녀는 쟈니에게 이 동우회는 책에 낼 자료를 모으는 동안 야전 병원의 환자 가운데 글을 쓰는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어서 시작하게 되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월간 대서양]지의 전 편집인 도로시 보이스와 1차 세계 대전의 재향 군인 작가 아더 새개트, 그리고 할로란 병원에 있었던 랠프 펙을 소개해 주었다. 그들은 저술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며, 몇 줄을 받아 써보라고 했다. 그는 한 문단을 받아쓰고는 문법이 틀렸기 때문에 당혹스러워 변명을 해야 했다. 그들은 그를 격려해 주고 다시 오겠다고 했다. 

The Red Cross worker told him there was someone the wanted him to meet. "I will bring her around and introduce you to her," she said. That evening, Johnny met Henrietta Bruce Sharon, founder and organizer of the Veterans Authors' Workshop.
She told Johnny that the workshop had started as a result of an interest in creative writing she had found among patient in military hospitals whill gathering material for a book. She introduced him to Dorothy Boyce, a former editor of the Atlantic Monthly: Arthur Sagat, writer-veteran of World War I; and Ralph Peck, an ex-Halloral Patient They talked to him about Writing, and asked him to set down a few sentences. Embarrassed and apologetic for his grammatical errors, he dictated a paragraph. They encouraged him, and said they would be back again.

어느 날 저녁에 동우회 회원들이 쟈니의 병실에 왔을 때 그는 소설 견본을 보여 주었다. 미스 샤론은 되돌려 주며 "썩 좋지 않은 데요. 그러나 우린 이 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 예요. 나는 쟈니가 여러 차례 다시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중요한 건 적어도 쟈니가 지난 주에 관심을 갖고 있던 것에 대해서 썼다는 것입니다."

On another evening, when the workshop members arrived at the paraplegic ward, Johnny had a sample of fiction. "It wasn't vet good," Miss Sharon recalled, "but that was not what we were interested in then. I could see Johnny had rewritten the page sever times. At least he had had something to do the past week in which he was interested."

그것이 시작이었다. 매 주일 그룹 미팅이 이어지면서, 보행이 가능한 환자들을 위한 동우회가 계속되었다. 유명한 작가와 편집인들이 환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노력을 평해 주었고, 그들 몇몇은 쟈니를 만나려 왔다. 그래서 동우회 회원들과 존 허시, 어윈 쇼와 같은 유명한 손님들이 찾아오는 수요일 밤을 기다리며 그에게 관심이란 것이 일어나게 되었다. 쟈니가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에 대한 진료 차트에 의사들은 낙관적으로 기록하게 되었다.

That was the start. Week after week, following the group meeting the workshop held for ambulatory patients, where well-known writers and editors talked with patients and criticized their efforts, some of them went to see Johnny. His interest was aroused, and he looked forward to the Wednesday-night visits with the workshop group and their guests, such as John Hersey, Irwin Shaw, Hervey Allen, Rex Stout, John Mason Brown, Emily Hahn, Joe McCarthy and Myer Berger. Johnny became interested, and the prognosis notes made by the doctors on his chart became more optimistic.

방문이 시작된 이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마침내 쟈니는 휠체어를 타고 그룹 미팅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는 더욱 열정적이 되어 갔고, 같은 병동의 다른 사람들에게 참석하기를 권유했다. "쓰는 것에 관심이 없더라도 이 병실을 벗어날 수 있는 좋은 일 아니야. 자네의 여생을 자신 속에다 가두어 둔 채로 보내고 말 수는 없지 않나. 이제 시작하게."라면서.

Finally, a few months after the visits started in January, Johnny attended one of the group meetings in a wheel chair. He became even more enthusiastic, and urged the other men of the paraplegic ward to attend. "Even if you don't care about writing," he argued, "its good for you to get out of this ward. You can't spend the rest your life cooped up by yourself. Come on over."

몇 사람만 나갔을 뿐이지만, 대부분은 쟈니에게 일어난 변화에 내심으로 기뻐했다. 1946년 10월 쟈니는 퇴원했다. 적십자의 봉사자인 그레이 부인과 재향 군인 작가 동우회 회원들이 의사가 처방해 줄 수 없는 중요한 것을 해 주었던 것이다. 즉 동기부여, 살겠다는 의지, 가능한 한 독립적으로 살아 보려는 의지 말이다.

Some men went, but most of them smiled inwardly at the clean, that had come over Johnny. In October 1946, he left the hospital. The Red Cross Gray lady and the members of the Veterans Authors' Workshop had provided something important that no doctor can give by prescription-motivation, the will to live, the will to live as independently as 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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