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에 고함>- 지체 장애인의 시각에서-

 

 

 

 

 1995. 11. 9.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

KNCC 주최 제 2회 장애인 체험대회의
 하나된 찬양제에서

집필: 이홍익.

대독: 이만희.

 

장애인을 대표해 이 글을 쓰게 된 사람은 소위 선천적 장애라는 뇌성마비 장애를 입은 사람입니다(엄격하게 따지면 출산 중의 난산으로 인한 경우이기에 후천적 사고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글을 대신 읽어 주는 사람은 장애라고 하는 것과는 전혀 모르고 자유롭게 활동하다가 최근 들어 급증하고 있는 산업 재해로 한 순간에 후천적 장애를 입은 척수 장애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장애인 하면 거의 대부분 선천적 장애인으로 생각하게 되어서 인생의 출발부터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들로 여기며 가까이하기 힘든 사람들로 생각해 온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와 같은 인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장애인에 대한 선교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의 장애인 가운데 사고나 질병의 후유증으로 발생된 후천적 장애인이 85%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또한 장애인에 대해 관심이 있는 대부분의 교회에서도 불우 이웃 돕기 차원에서 연례적으로 수용 시설을 방문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한 것으로 여기고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설에 수용된 장애인은 1% 밖에 안되고 절대 다수의 장애인은 일반 가정에서 생활하고 있는 在家 장애인들입니다.

이런 사실을 지적해 볼 때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장애인에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져야만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으로 지움을 받아 허락해 주신 온갖 축복을 누리며 그 영광을 위하여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받은 온 천하보다도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원죄에 의해서 그 형상과 함께 축복과 권한을 상실한 채 죄와 죽음이 주는 불안 속에서 끊임없이 시달려야 하는 비참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구원을 갈망하고 있다는, 이 사실에는 장애와 비장애라는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된 보좌를 버리시고 죄의 몸을 입고 십자가를 대신 지심으로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기쁜 소식, 즉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교회가 존재해 왔고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 왔다고 이 나라와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 어느 나라 교회보다도 불타는 사명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복음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세계의 오지를 향해 생명까지 바칠 각오로 선교를 펼치고 있고 또 거액을 투자하며 파송하는 지금, 등잔 밑이 오히려 어둡다고 바로 우리 곁에서 단지 장애란 이유 때문에 홍수처럼 퍼져 나가는 복음을 접할 기회조차도 차단 당하고 있는 이웃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우리 교회에는 장애인이 없으니 장애인과는 상관이 없다고 여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수 백, 수 천 명이 넘는 교회가 5만이 넘는다는 데 교회에서 장애인을 찾아보기 힘든 실정입니다. 장애인이 한 나라 인구의 10%를 차지한다고 하는 데도 과연 교회 주위에 장애인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10여 년 전에 이런 일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내 자신이 在家 장애인이지만, 그 용어조차도 낯설던 때였는가 봅니다. 내가 목발을 짚고 산책하는 것을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유심히 보면서 언제부터 그렇게 라도 걷게 되었냐고 물어 왔습니다. 그리고는 열 일곱 살 먹은 자기 아들이 집에서 누워서 지낸다고 사정이라도 하듯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언어 장애로 말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도망해 오다시피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생각날 때마다 마음을 아프게 해 주고 있습니다.

장애로 인해 이 세상에서 불리한 상태로 살아가야 하면서도 영생에 이를 구원도 받지 못해서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받아야 하게 한다면, 먼저 믿는다는 자로서 어찌 주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저 역시 교회에 나가기가 무척 힘든 상태입니다. 본 교회가 있지만 이사할 때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로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교인들은 장애를 보고 흔히 하는 말 가운데는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장애를 입었으니 하나님이 특별히 더 사랑을 해 주실 것이라고 위로해 줍니다. 또 성경을 인용하면서 멀쩡한 육신으로 죄짓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장애를 지니고 살다가 천당에 가는 게 낫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럼 장애가 무슨 특권이라도 된다고 장애인은 죄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구원도 필요 없는 존재라는 말인지 묻고 싶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만 믿으면 무조건 다 고쳐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무리 믿어도 장애란 현실이 주는 불편함이나 고통을 결코 경감시켜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애란 인생의 한 조건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건치고는 너무나도 나쁜 조건입니다. 치료해 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아직도 믿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나의 유일한 구주로 믿지는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믿었더라면 예수님에게서 실망과 상처만 받았을지 모릅니다. 그 대신 복음은 저에게 보통 사람들 보다 훨씬 힘든 인생을 살아야 만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저마다의 독특한 달란트를 지니고 태어나게 하신다는 사실과, 동시에 모든 사람은 보이던 보이지 않던 저마다의 일정한 자기 한계라는 장애를 지니고 살아가게 만드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각자 자신의 달란트를 발휘해서 자기 한계를 극복해 가려는 노력들이 모여 인간의 역사를 이루어 가고 있다는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애인에게 주어야 할 복음이란 장애와 상관없이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구원받아야 되는 하나의 죄인이라는 것을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며, 아무리 하찮게 보일지라도 모든 생명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대해 소명 의식을 지니고 자기 달란트를 소중하게 가꾸어 가는 가운데 보통 사람들과 상부상조하며 살아 갈 수 있도록 하는데 교회의 사명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어떻습니까? 장애인이 교회에 나가기 힘들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시정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단적인 예로써 9월 15일자 [장애인 복지신문]에 부산지역 공공기관의 장애인 편의 시설을 현지 조사한 기사가 났습니다. "특히 종교시설의 경우 기독교와 불교기관 2곳을 조사했으나 출입구 이외에는 장애인 편의시설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편의시설 설치 대상인지도 모르고 앞으로 설치계획도 없다고 대답해 종교시설의 편협성을 드러냈다"라고 나왔습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약한 자들을 돌보는 것인데 한국 교회는 지나치게 성인 중심으로 모든 시설을 건강한 사람만을 위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을 위해서 불편한 사람들이 영생으로 나가는 길 마저 양보해야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교회의 시설이라는 문턱이 높아서 장애인이 교회에 못 나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장애인 교회라고 해서 시설이 좋은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장 불편한 사람들이 편하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도 편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건강해도 나이 들면 불편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문턱보다는 교회의 문턱을 높게 만든 자세라는 문턱이 높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애가 심한 장애인이 힘들게 교회에 나가면 "몸도 불편한데 왜 힘들게 나오느냐"고 한다고 합니다. 교회에 나가기 힘든 장애인에게는 교회에까지 가는 힘든 과정까지도 예배의 일부가 된다고 믿습니다.

지금 저도 계단이 많은 교회에 다니느라고 주일마다 힘든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계단을 오를 땐 부축을 받아야 하는데 부축을 부탁하기 위해 매 주일 구걸하는 심정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몇 몇 분들은 저를 먼저 보고 달려와 부축해 주면서 "이렇게 나오는 것만도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고 하며 자신들이 더 기뻐하는 것을 보면 힘들어도 한 주일도 안 거르고 열심히 교회에 나와야겠다는 힘을 얻게 해 줍니다.

그렇지만 보다 중요한 점을 일반 교회를 10년 넘게 다니다가 최근 장애인 교회로 옮겨야 했던 한 장애인은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려 다니는데 불편이 없도록 최선의 배려를 해 주었지만, 교인들과 함께 어울리고 활동하기에는 벽이 너무 높아서 장애인 교회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교회란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들로써 함께 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나누며, 선교와 봉사 활동을 행하는 곳이 아닌 가요. 그런데 왜 장애인들은 일반 교회에서 장애인 교회로 찾아 갈 수밖에 없는지 교회와 장애인 모두에게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한편으로 일반 교회의 교인으로써 잘 적응해서 활동하는 장애인들도 많이 있는 줄 앎니다. 그 예로써 중도 장애로 하반신이 마비된 한 장애인을 알고 있습니다. 장애를 입게 되자 아는 사람도 만나기 싫어하며 집안에서만 지내고 있는 그에게 이웃에 사는 집사님이 꾸준히 찾아 와서 말벗이 되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전혀 모른 채로 세상만을 즐기며 살아왔던 그였지만 그 집사님의 정성에 감동해서 스스로 무릎 꿇고 주님을 영접해 교회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몇 년이 안 된 지금 그 교회의 구역장을 맡아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보인다고 해서 장애인들이 결코 무능력한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다른 모습을 통해서 다른 달란트를 주셨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렇게 인식이 바뀔 때 여러 모습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달란트를 지니고 보완하면서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교회가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 있어야 하며 지금 한국 교회는 과연 어떤 사람들을 위해 우선 순위를 두고 일하고 있습니까? [잃은 양]을 찾기 위해 각 교회마다 전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정작 복음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기 힘든 장애인이 아니겠습니까? 장애인들은 큰 상처를 지니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복음과 함께 따뜻한 사랑의 말과 행동으로 감싸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어서 어떤 조건에도 더 이상 상처받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들어낼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재활인 것입니다. 이처럼 사회에서 쓸모 없다고 버림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목적을 일깨우며 하나님께 필요한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각 교회마다 [잃은 양]을 찾기의 일환으로 아직도 숨겨져 있는 장애인들을 찾아 나서는 운동을 펼치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심어 주고 기도하며 전도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믿는데는 장애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애인 스스로가 선교의 주체로써 비장애인만의 선교가 미칠 수 없는 영역을 담당하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가 져야 할 더 큰 고난의 죄 짐을 대신 지신 십자가의 의미가 극명해질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고난을 함께 지는 믿음의 공동체, 또한 장애와 비장애를 떠나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누는 가운데, 서로의 빈곳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룸으로서 저마다의 고난을 의미 있는 고난으로 받아들이며, 함께 극복해 가는 데 본래의 교회의 사명을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12:23-7의 말씀을 실천하는 길일 것입니다.  즉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재가 장애인 선교의 방향                                          하늘 문이 열린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