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을 보는 관점

 

 

 

 

세계 고전들을 읽어 가다 보면 장애인에 대해서 말한 대목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고전들이 지금까지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할진대 비교해 볼 만한 일이다.

 

유교의『論語(논어)』에는 공자는 “상복을 입은 사람, 예복을 입은 사람, 앞을 못 보는 사람, 이런 사람을 만났을 때는 비록 그들이 나이 어린 사람일지라도 공자는 반드시 일어나 정중히 대해 주고, 그 앞을 지나갈 때면 빠른 걸음으로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지극히 상식적이라 할 수 있는 만큼 지금도 모범적인 에티켓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다.

유교와 대조를 이루며 우리의 심성에 보이지 않게 영향을 준 道家(도가)의『莊子(장자)』에서는 禮義(예의)를 강조하는 유교의 외형에 치우친 형식적인 면을 비꼬기 위해서 상식을 넘어서 파격적으로 장애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공자가 애써서 가르치고 있는 교훈보다는 장애인들이 보기에 흉한 모습을 하고는 있을지라도, 오히려 사람들에게 위안을 더 많이 주고 있다고 했다. 바로 그래서 내면의 덕이 뛰어나면 겉모습은 잊게 되는 법이라고 했다(故德有所長 而形有所忘:德充付).

또한, 불교에서는 “장애란 부러진 가지 옆에 새로 핀 꽃이다.”라고 한다.

“비바람 세차게 몰아쳐 가지가 부러지면 많이 아팠지. 하지만 생긴 것은 언젠가는 사라지는 법이니 조금도 미련을 둘 것 없지. 그리고 사라진 그 자리가 곧 새로 생기는 자리가 되니 그 자리를 뿌리 삼아 그 옆에 또 다른 가지를 만들어 냈지. 힘들게 새로 만든 가지마저도 부러지면 땅속으로 뿌리를 더욱 깊이 내려 땅의 힘을 얻어 또 새로운 가지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 노란 옷을 입었지. 그러니 내 온몸이 뿌리다….”

 

서양 문화의 양대 정신인 헬레니즘과 히브리즘 역시 대조적인 시각을 보여 주고 있다. 헬레니즘의 핵인 플라톤의『국가론』에서 자기의 유토피아를 그리면서 “혈통을 순수하게 하기 위해서 열등한 사람들의 애들과 불구로 태어난 애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슬쩍 없애 버려야 한다.”라고 말했다(5권 460c). 그런 사고방식에서 약육강식의 진화론이 나왔을 법하다. 한편 히브리즘의『성경』은 신․구약으로 나누어지는데, 구약에서는 장애인들은 점잖은 자리에 나설 수 없지만 보호해 주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신약에서는 소외된 존재들 가운데 하나로 비장애인들과 똑같은 구원해야 할 대상으로서 장애인들이 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예수님은 장애인들을 보고 그 원인을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한복음 9:3)라고 선언함으로써, 장애란 죄의 결과라는 구약에서의 인과응보의 상식을 넘어서서 고난을 통한 구원이라는 차원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자기 죽음 앞에서도 삼가던 신적인 능력을 아낌없이 동원해서 고쳐 주면서까지 사랑을 베풀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동양적 사상이 지배하던 사회에서는 장애인들을 부조의 대상으로서, 동정을 베푸는 가운데 자신들이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이웃으로 여겨 왔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플라톤의 사상을 근간으로 한 헬레니즘이 지배하던 서양에서는 적자생존의 법칙이 주도하면서 장애인이란 사회적 존재로 나타날 여지가 허용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상반된 사고방식인 히브리즘의 기독교도 헬레니즘의 영향 속에 예수님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될 수 없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제한된 역할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모든 문화권은 대조적인 사고방식이 보완을 이루는 가운데 발전해 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싫든 좋든 이들 사고방식들이 공존하고 있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장애인에 대해 부정적인 헬레니즘의 영향을 더 강하게 받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아니 기존 동양적 사고방식들까지도 도태시키고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사회가 되고 있다. 그럴수록 사회적 약자들은 철저히 소외되어 갈 수밖에 없다.

선천적 요인과 더불어 과거에는 전쟁과 형벌이라는 후천적인 요인이 장애의 주된 원인이었다. 한편 현대에 와서는 서양 문명의 산물인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구가 급증하고 있고 그에 따라 생존 경쟁이 어느 때보다 격심해져 가고 있다. 그래서 문명이 발달할수록 선천적 요인은 감소해 가는 반면 생존 경쟁의 부산물로 인한 피해와 더불어 후천적 요인은 가속적으로 늘어나 85% 이상을 차지해 가고 있다. 과학 기술이란 보다 편리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인데, 그 도구가 목적 인양 사람을 사회의 톱니바퀴로 도구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사람이 대치 가능한 한낱 소모품같이 되어 가면서, 사회적 규격에 조금이라도 안 맞으면 필요 없는 존재라고 도태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러한 악순환 속에서 더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을 만큼 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이 양산돼 가는 사회이다. 이러한 현실에 맞는 장애인관이 정립되어야 한다. 바로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의 관점이 사회적으로 절실해진 시대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타인들을 있는 그대로 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대하시는 모습으로 바라보라”라는 말처럼 모든 장애 유형 간에 나아가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차별 없는 구분>으로 조화를 이루어 가는 사회가 돼야 한다.

 

우리가 모두 궁극으로 바라는 <복지 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라고 할 것이다. 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가 그 나름의 삶의 의미를 인정받으며 살아가는 가운데 각기 독특한 달란트를 발휘하는 사회가 모두가 잘사는 사회요, 모두에게 의미 있는 삶이 되지 않겠는가! 94. 5(2019. 11. 재교)

 

역사 속의 장애인                                            재가 장애인 선교의 방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