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의 만남 (1)

 

 

 

이제껏 책을 읽는 일, 오직 이 한 가지 밖에는 내게 주어진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듯한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많은 것도 아니지만, 책 한 권 두 권 사기 위해 이끌어줄 스승도 선배도 없이 오직 책 속에서 길을 찾아내듯 힘겨운 선택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고, 또 서점에는 한 번도 가 보지도 못한 채 남을 시켜서 사야 하는 남다른 어려움을 거쳐야 했기에 후회가 되는 것도 많다.

특히 초기에 사서 읽은 책들의 대부분이 『세계문화사』(학원사, 1964)와 교과서에서 소개받은 동서양 고전들인데, 번역을 고려해서 선택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살펴볼수록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그런 시행착오를 통해서 오늘이 가능해진 것이라고 믿기에 1,500여 권에 이르는 책들 모두가 분신처럼 여겨진다. 그 부끄러운 것을 이제는 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도 시행착오 중이지만 이젠 최고의 수준이라고 할 만한 것들만 사서 읽고 있다고 할 만큼 되어 가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비할 데 없이 큰 부자가 된 마음이다.

내가 책을 읽는 일은 고전이라는 지도를 살피며 책의 밀림을 탐험하고, 또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책의 바다를 항해하는 과정을 통해야 한다. 그러는 가운데 환경 속에 무기력하게 붙들려 있을지라도 이 조용한 행위를 통해서 끊임없이 나 자신을 키워 가며, 마침내 그 환경을 넘어서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 때문에 고심해야 하는 또 한 가지 문제는 읽고 난 책을 어디에다 놓아야 하는가이다. 애써서 읽고 난 책들을 자랑하듯이 서가에 체계적으로 배열해 놓으며 나만의 세계를 구축해 놓는 일이다. 이제 책장 8개가 거의 다 차서 어떤 것을 빼고 새로 꽂을 것인가, 점점 미치게 만든다. 쌓아 두어야 했었던 한동안 읽은 책들을 정리하듯이 책장에 자리를 찾아 비벼 넣곤 한다. 언제나 몇 권만을 교체해도 책장이 항상 새로워진다. 책들의 수준이 고르게 높아져 가는 것을 볼수록 흐뭇해진다. 가장 순수한 행복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한다!

누군가가 내 책장을 둘러보고는 순전히 ‘돈’이라고 했던가. 물론 돈이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그 속에 스며 있는 내 인내와 지혜의 결정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 중의 제일은 인내라고 하고 싶어진다. 돈이 많다면 훨씬 더 비싼 책들을 얼마든지 사다가 호화롭게 장식해 놓을 수 있을 테니까...!

독서하기 시작했을 때 사들인 책에 번호를 붙여 놓는 게 좋다는 얘기를 들어서 사 오기 바쁘게 번호를 써 놓으니 더 애착이 가게 해 주었다. (처음엔 사 온 책들의 목록을 공책에 기록했다가 PC를 쓰기 시작하면서 dBASEⅢ+, 어프로치, Access를 거쳐 엑셀로 관리하고 있다)

 

최초로 책과 만난 기억은 어머니가 글자를 가르쳐 주시던 헌 교과서였다. 초등학교 과정을 계속 교과서로 배우게 되었지만, 본격적인 책과의 만남은 아버지가 사다 주신 12권짜리 『세계전기전집』(삼화출판사,1964)과 15권짜리 『세계동화전집』(삼화출판사.1965))이었다. 나이에 비해 수준이 높아서 처음에는 주위 분들이 읽어 주었고, 다시 직접 읽으며 역사를 수놓았던 주인공들과 만나 볼 수 있었다. 백여명에 이르는 위인들의 전기가 망라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 자신의 환경을 끝까지 극복해 간 링컨, 자신과의 약속을 현실의 편함에 타협하지 않고 평생을 통해 지키며 자기 사상을 실천한 슈바이처, 자기 인생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것 같은 장애에도 그를 통해서 더 높은 예술을 완성해 낸 베토벤이 인상적이었다.

『세계동화전집』에는 안데르센, 그림 동화, 이솝 우회, 아라비안나이트, 서유기를 비롯해 각국 동화가 포함되어 있었다.

가정 형편도 어려워지고 안내해 줄 사람이 없어서 소위 명작 소설을 읽을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가 힘들었다. 아버지가 본 책을 뒤져야 했는데, 그 속에서 『삼국지』, 『셰익스피어 전집』, 『전쟁과 평화』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는데, 지금까지 큰 즐거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박종화 소설 대표 선집(삼성출판사 1966)>이 있었는데 그의 역사 소설은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 사실 위에 민족의식과 인간의 내면을 심도 있게 그려낸 것이 특징이라는데, 인물 중심의 서술과 서사적 구성을 통해 발휘한 작가적 상상력을  진짜 역사로 뇌리에 각인이 되어서 한국사 공부에 빛과 그림자가 되기도 했다.

후삼국 시대를 삼국지만큼 재미있게 읽은 삼국풍류(상·하),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 그리고 신돈의 이야기를 통해 고려 말의 역사를 다룬 『다정불심(多情佛心)』, 연산군의 비극적인 생애와 갑자사화를 다룬 초기 대표작인 『금삼의 피』, 중종 시대 문정왕후와 정난정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 중기 권력 투쟁을 다룬 『여인천하』, 임꺽정을 연상케 하는 『홍경래/계월향』 등이 있었다.

어렸을 때 친삼촌과 외삼촌의 책장에 『나는 이렇게 보았다』라는 같은 책이 있어서 궁금했었는데 그 무렵에 읽어보았다. 일본인 오다(小田)가 쓴 책인데, 오다가 영어도 잘 못하면서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신청해 합격, 미국 유학을 떠난 경험을 기록한 것이면서 1958년 귀국길에 세계 일주한 경험을 엉뚱하고 자유분방한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본 여행기 성격의 책으로 1962년 한국어 번역판 출간 3개월 동안 9판을 찍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재미있었지만 여러 명이 나누어서 번역하면서 용어가 전혀 통일이 안 돼서 혼란스러웠는데, 그 시대의 출판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한국에서는 세계일주가 거의 불가능한 꿈 같은 일이었기에 독자들에게 큰 충격과 호기심을 끌었다고 한다. 얼마 후 우리나라에서도 그와 유사하게 김찬삼교수가 LA에서 유학하고 나서 귀국길에 세계 일주한 경험을 쓴 『世界一周無錢旅行記』(어문각 1962)가 나왔다 하는데, 요즘 말로 배낭여행인데 그땐 처음이라서인지 無錢(무전)여행이라니 허풍도 심했다. 지리학을 전공한 그가 세 번에 걸친 세계일주 여행을 모아서 6권으로 1970년대에 컬러판으로 나왔는데 삼촌이 이 책들을 산 덕에 읽어볼 수 있었다. 여행기를 읽을 땐 지도책을 펼쳐 놓고 코스를 따라가면서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 되곤 했다.

그래서 더 세밀한 지도책을 구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몸부림을 쳐야 했다. 읽을 책이 맞닿지 않을 땐 지도책을 펼쳐 놓고 종일 혼자 상상 여행을 하곤 했다.

그처럼 책에 욕심이 많으신 삼촌에게서 좋은 책들을 얻어 보게 되었는데, 다시없는 큰 행운이었다. 그중 12권짜리 『大世界의 歷史』(삼성출판사,1972)는 역사가 무엇인지 눈을 뜨게 해 주었고, 무슨 책들을 보아야 할지 정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특히 역사란 평등의 폭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이란 결론을 얻었는데, 계속 역사를 탐구해 갈수록 옳았다고 여기고 있다.

1974년 초에 생각지 않게 『죄와 벌』을 사서 읽게 되면서부터 내가 책을 직접 선택해서 사서 읽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내 또래들이 대학 입시의 좁은 문을 뚫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을 그 때에 갈망하던 고전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그 당시 동생들이 얻어다 주는 문고판 목록이야말로 다시없이 귀중한 안내자들이 되어 주었다. 책과의 만남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