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의 만남 (1)

 

 

 

이제껏 책을 읽는 일, 오직 이 한가지 밖에는 내게 주어진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듯한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많은 것도 아니지만, 책 한 권 두 권 사기 위해 이끌어 줄 스승도 선배도 없이 오직 책 속에서 길을 찾아내듯 힘겨운 선택의 과정을 거쳐야만 되었고, 또 서점에는 한번도 가 보지도 못한 채 남을 시켜서 사야 하는 남다른 어려움을 거쳐야 되었기에 후회가 되는 것도 많다. 특히 초기에 사서 읽은 책들의 대부분이 『세계문화사』와 교과서에서 소개받은 고전들인데, 번역을 고려해서 선택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살펴볼수록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내가 책을 읽는 일은 고전이라는 지도를 살피며 책의 밀림을 탐험하고, 또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책의 바다를 항해하는 선택의 과정을 통해야 한다. 그러는 가운데 환경 속에 무기력하게 붙들려 있을지라도 이 조용한 행위를 통해서 끊임없이 내 자신을 키워 가며, 마침내 그 환경을 넘어서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 때문에 고심해야 하는 또 한 가지 문제는 읽고 난 책을 어디에다 놓아야 하는가이다. 애써서 읽고 난 책들을 자랑하듯이 서가에 체계적으로 배열해 놓으며 나만의 세계를 구축해 놓는 일이다. 이제 책장 5개가 거의가 다 차서 어떤 것을 빼고 새로 꽂을 것인가가 점점 미치게 만들어 준다.

 

 

쌓아 두었던 한동안 읽은 책들을 정리하듯이 책장에 자리를 찾아 비벼 넣곤 한다. 언제나 몇 권만을 교체해도 책장이 항상 새로워지다. 책들의 수준이 고르게 높아져 가는 것을 볼 수록 흐뭇해진다. 가장 순수한 행복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한다!

누군가가 내 책장을 둘러보고는 순전히 '돈'이라고 했던가. 물론 돈이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그 속에 스며 있는 내 인내와 지혜의 결정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 중의 제일은 인내라고 하고 싶어진다. 돈이 많다면 훨씬 비싼 책들을 얼마든지 사다 장식해 놓을 수 있을테니까...

독서를 하기 시작할 때 구입한 책에 번호를 붙여 놓는 게 좋다는 얘기를 들어서 사 오기 바쁘게 번호를 써 놓으니 더 애착이 가게 해 주었다. 언제까지 계속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 목숨과 정신이 붙어 있는 한, 계속 할 수 있기를 소망할 뿐이다.

최초로 책과 만난 기억은 어머니가 글자를 가르쳐 주시던 헌 교과서였다. 초등 학교 과정을 계속 교과서로 배우게 되었지만, 본격적인 책과의 만남은 아버지가 사다 주신 『세계전기전집』(삼화출판사,1964)과 『세계동화전집』(삼화출판사)이었다. 나이에 비해 수준이 높아서 처음에는 주위 분들이 읽어 주었고, 다시 직접 읽으며 역사를 수놓았던 주인공들과 만나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자신의 환경을 끝까지 극복해 간 링컨, 자신과의 약속을 현실의 편함에 타협하지 않고 평생을 통해 지키며 자기 사상을 실천한 슈바이처, 자기 인생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것 같은 장애에도 그를 통해서 더 높은 예술을 완성해 낸 베토벤이 인상적이었다.

가정 형편도 어려워지고 안내해 줄 사람이 없어서 소위 명작 소설을 읽을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가 힘들었다. 아버지가 본 책을 뒤져야 했는데, 야담류가 대부분이어서 별로였다. 그 속에서 『삼국지』,  『셰익스피어 전집』,『전쟁과 평화』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는데, 지금까지 큰 즐거움을 주고 있다.

책에 욕심이 많으신 삼촌에게서 좋은 책들을 얻어 보게 되었는데, 다시없는 큰 행운이었다. 그 중 12권 짜리 『大世界의 歷史』(삼성출판사,1972)는 역사가 무엇인지 눈을 뜨게 해주었고, 무슨 책들을 보아야 할지 정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특히 역사란 평등의 폭을 확장시켜 나가는 과정이란 결론을 얻었는데, 계속 역사를 탐구해 갈수록 옳았다고 여기게 된다.

생각지 않게 『죄와 벌』을 사서 읽게 되어 그 때부터 내가 책을 직접 선택해서 사서 읽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내 또래들이 대학 입시의 좁은 문을 뚫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을 그 때에 갈망하던 고전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그 당시 동생들이 얻어다 주는 문고판 목록이야말로 다시없이 귀중한 안내자들이 되어 주었다. 책과의 만남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