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배우기

 

 

 

내 몸을 고쳐 보려는 노력에도 열 살이 되도록 뚜렷한 진전이 거의 없자 어머니는 나의 현실을 인정하시고, 그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장애가 심하다고 특히 언어 장애와 글씨를 쓸 수 없다고 아예 학교에 보내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나이에 맞추어서 공부를 시키기 시작하셨다.

보통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뛰어 놀 때 이미 ㄱㄴㄷ이 새겨진 나무 블록(요즘 말로)을 갖고 놀며 글자를 익히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1학년 과정은 때가 새까막하게 낀 헌 책을 사서 어머니가 가르쳐 주시고 그 다음 과정은 내 또래의 친척 아이들과 어울리며 과외 공부를 통해 배울 수 있게 해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가 내게 해 주신 가장 중요한 일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2학년 2학기에야 처음으로 새 책을 만져 보게 되어서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지금도 새 책을 펼치게 될 때마다 떠오르곤 한디).

초등학교 과정을 마칠 무렵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지자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던 가정 교사를 계속 둘 수 없게 되어서 공부를 계속 할 수 없게 되었다. 한 1년 동안 그렇게 무중력 상태에서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며 되는대로 지내다가 어느 날 생각해 보니 이렇게만 지내면 나만 인생의 낙오자가 될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때까진 같이 공부하던 친척 아이들과 무조건 똑같이 하려고 공부하는 방법을 그대로 흉내 내려 했고, 교복까지 사 달라고 할 정도였다. 그들에게 가르쳐 달라고 졸라대기도 했었지만 자기들 갈 길을 가기도 바쁘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똑같이 흉내 내려고 해도 그들을 좇아 갈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막연하게 믿고 있었던 신앙의 재발견을 통해서 인생의 길이 결코 하나일 수만은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고유한 삶의 목적을 부여하셨고 그에 따라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그래서 "나의 길이 멀리 돌아가야 하는 힘들고 외로운 길일지라도 그만큼 가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나 할 수 없는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기에"라고!

그래서 누가 해 주기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시작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어렵다고 포기했던 책들을 찾아 들고서 씨름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른 과목들은 계속 해 올 수 있었는데 영어와 수학이 문제였다. 영어 교과서를 그냥 읽어 가면서 단어들을 사전을 찾아 꿰어 맞추는 식이었다. 단어 외우기를 아주 귀찮아했었는데, 그렇게 반복해서 사전을 찾다 보면 저절로 외어지게 되어서 쉽게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last day," "last night"라는 것이 나왔는데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전은 맨 앞에 나와 있는 의미만이 전부라고 알고 있었기에 거기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물어 볼만한 사람도 없었고 물어 볼 생각도 못한 채 며칠을 혼자 끙끙거리다가, 동생에게 번역이 나와 있는 자습서를 사 오게 했다. 자습서를 펼쳐 보자 간단히 풀렸다. 그것을 경험으로 원문과 번역된 것을 대조하면서 사전을 붙들고 씨름하다 보니 할만 했다. 그런데, 수학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러던 중, 전혀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교회 전도사님을 통해 사정을 해 어렵게 구한 가정 교사로 며칠 와서 날 가르치고 간 대학생이 내가 수학을 못하는 이유가 수식을 쓰지 못해서 암산으로만 하니까 그렇다고 하면서 연필로 글씨를 써 보라고 한 것이 계기가 되어 글씨를 쓰는 연습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내가 연필을 잡고서 글을 쓴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것으로 모두가 여기고 있었는데, 지렁이가 꿈틀거리고 기어가는 모양일지라도 자꾸 써 보니 얼마 안 있어 큼지막하더라도 알아 볼 만큼 쓸 수 있게 되었다. 내 손으로 내 생각과 느낌들을 표현한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해 손이 뻘겋게 달아오르도록 힘겨운 경주를 멈출 줄 모르고 계속 쓰게 되니, 저절로 일기의 형태가 되어 내 생활에서 떼어 놓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내 인생에 있어 진짜 기적이었다. 그러나 내 손으로 글씨를 쓰기가 너무 힘들어서 지금은 컴퓨터를 쓰게 되었지만, 그 동안 힘들게라도 일기를 꾸준히 써 오지 않았더라면 이 만큼이라도 표현할 능력을 길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게 된다.

집안 형편 때문에 책을 사 보기가 어려웠지만 어떤 책을 선택해야 할지가 훨씬 더 어려웠다. 삼촌이 사다 놓은 브리태니카에서 나온 단계별 백과 사전류들을 원서로 보게 되었는데 아동용부터 시작하니 재미있어서 꾸준히 읽어 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원서를 갖고 씨름하다 보니 폭넓은 지식과 함께 폭넓은 어휘력을 쌓을 수가 있었다. 문법은 전혀 모르는데 영어를 잘 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다양한 원서들을 충분히 읽어 낼 수 있게 된 이유가 어휘력과 실전(다독) 경험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내가 배울 무렵 교과서에 한문이 없었기 때문에 한문을 배우지 못해서 대학 과정의 어려운 책들은 어떻게 읽을 수 있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삼촌이 {한국문화사대계}를 사 왔다고 갔다가 보라고 하셨다. 아주 좋은 책이었는데 완전히 한문 투성이어서 그만둘까 하다가, 내게 있는 건 시간뿐이라고 옥편을 펴놓고 한자 한자를 일일이 찾아가며 읽기 시작했다.

옥편을 찾는 법도 몰랐지만 자꾸 찾다 보니 요령을 터득하게 되면서 1년 동안 10권을 통독하고 나니 아예 옥편의 배열 순서를 외울 정도가 되었다. 그 전집은 우리나라의 문화사를 각 분야별로 역사적으로 정리해 놓았기에 요령을 터득하기가 쉬웠다. 예를 들어 식품사일 경우 식품에 관한 대부분의 한자들은 먹을 식(食) 자가 붙어 있어서 먹을 식(食) 부수에서 찾으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다음에 읽게 되는 어떠한 책도 그만큼 한문이 많은 건 없기 때문에 초전박살내 버린 셈이다.

같이 공부하던 동갑내기 삼촌에게 물어서 교과서를 사서 고등학교 과정을 할 수 있었는데, 그 다음 대학 과정은 어떻게 할 것인가가 걱정이었다. 바로 몇 해전에 방송 통신 대학이 개설되어 있어서 라디오 청강일지라도 혼자서 책으로만 공부하는 것 보다 나을 것 같아서 행정학을 선택해 2년 과정을 시작했다.

새벽에 시간을 맞추어 일어나 녹음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자다가 시간이 늦어서 놓치고 말 때도 있었고, 지금은 흔한 카세트 라디오도 없어서 잡음이 많이 나는 라디오에 구식 녹음기를 갖다 놓고 하는 녹음이 제대로 안되어 애태우게 하는 적이 많았다.

그렇게 어려웠던 가운데 학문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게 되어서 내 학문의 기초를 다지게 해 주었다. 마땅한 학과가 없어 행정학을 택하게 되었지만 막연히 호기심만 갖고 있었던 사회 과학 분야여서 매우 흥미 있게 공부할 수 있었고 사회학을 계속 탐구하게 되었다.

방송 통신 대학 과정도 마치게 되자 그때부터 진짜 홀로 배우기가 시작되었다. 서점에 갈 수 없기에 신문에 나오는 신간란과 서점에서 가뭄에 콩나듯 어렵게 얻어 오는 도서 목록을 샅샅이 흩으며 독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 큰 고역이자 즐거움이었다. 지금도 책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언제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가 가장 큰 고민거리다. (그래서 하이텔에 가입하면서 ID를 Hong Ik Book Net의 약자로 정했을 정도니 말이다).

처음엔 국어 교과서와 문화사에 소개되었던 고전을 주로 사서 읽게 되었는데, 학교에 가서 배우게 되면 거의 교과서를 통해서 대강의 줄거리만 배우게 될 뿐인 고전들을 직접 부딪쳐서 읽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자부심마저 갖게 해 주었다. 그를 통해서 역사에 대한 안목과 철학의 흐름을 배울 수 있었다.

공부를 혼자서 해 온 과정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각 단계마다 이 초전박살 작전으로 어려운 고비들을 넘어서게 해 주셨다. 그래서 꾸준히 홀로 배우기의 길을 힘든 줄 모르고 걸어 올 수 있었다. 무리한 점도 있었지만 학문도 인생도 결국 인내해 내는 것이라고 배우게 된 것이 가장 큰 자산이라고 하고 싶다.(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