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와 재활

 

 

 

비장애인을 말할 때 예비 장애인이라는 용어를 종종 쓰고 있다. 썩 좋은 말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하도 불의의 사고가 많이 일어나서 후천적 장애인이 갈수록 크게 늘어나기 때문에 흔히 쓰여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의학의 발달로 장애인도 예비 비장애인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그만큼 장애와 비 장애의 구분이 덜해 간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을 환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선천적으로나 후천적인 원인으로 인해 필요한 치료가 모두 끝나도 흉터처럼 후유증이 남게 되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불리한 입장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장애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영어에서는 장애를 단계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즉 신체적, 정신적, 감각적 기관이나 기능 가운데 어떤 한 부분을 상실하게 되었을 때 손상(impairment)라고 한다. 손상된 그 부분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서 곤란을 겪게 되는 것을 기능 장애(disability)라고 한다. 그로 인해서 사회적 경제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면서 살아야 되는 상태를 사회적 장애인 핸디캡(handicap)이라고 부르고 있다. 기능 장애가 사회적 장애인 핸디캡이 되지 않고 살아 갈 수 있게 하는 것을 재활(rehabilitation)이라고 한다.

재활이란 완전 복구를 뜻하지 않는다. 흔히 장애로 인해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상실한 것으로 여기게 되지만 실은 그 일부만을 상실한 것일 뿐이다. 남아 있는 것을 활용해서 충분히 보완하며 살아 갈 수 있게 적응하고 훈련하는 것이 재활이다. 어떤 종류의 장애를 입었던 그 사람이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일상 생활과 사회 생활을 남의 도움없이 영위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모두에게 편하고 사회 전체적으로 이익이 된다.

그런데 장애인 복지를 논할 때 사회가 장애인에게 일방적으로 혜택을 베푸는 것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자원 재활용에 온 사회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데, 인적 자원의 재활용에 대해서 너무 등한히 해 오고 있다. 특히 장애인에 대해선 그런 의식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폐품을 방치해 놓으면 공해가 되기 때문에 관리비용이 점점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재활용하기 위해 투자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진 것이다. 장애인 역시 쓸모가 없다고 버려 두기만 하면 복지 비용만 늘어간다.

사회적으로 인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똑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욕구나 당위도 갈수록 커져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지 비용이 늘어날 수밖에 없고 자연히 일반 국민들의 세금 부담이 커지게 마련이다.

복지 수당을 받아서 의존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일하기 어려운 장애인에게도 일할 수 있도록 필요한 교육과 훈련을 시켜서 오히려 세금을 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국가적으로 크게 이익이 된다고 한다고 한 오래 전에 나온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정부나 대다수 국민들이 언제나 손익 계산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될까 하고 생각했었다. 바로 1948년에 나온 {장애인을 위한 희망}NEW HOPE FOR HANDICAPPED이라는 책이었는데, 1992년에 나온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한마음사)에서는 거기에서 훨씬 더 나아가고 있다.

 

일례로 우리들이 장애인를 어떻게 취급해 왔는지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 장애인는 타고난 근시나 사시인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악의에 희롱 당한 인간으로, 일생 그 핸디캡을 안고 살아야 한다고 간주 받아 왔다.

그렇지만 현재의 미국사회는 그들의 육체적 장애뿐 아니라 그 존엄에 가해진 상처의 치료에도 진력하고 있다. 많은 정부기관과 대학이 몰두하고 있는 장애인 원조의 수단은 다양한 면에서 필요이상으로 돈이 드는 것이었다. 많은 자치단체가 장애인 전용의 교통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신에 장애인가 이용하기 쉽도록 모든 공영버스를 개조했다. 공공시설에 휠체어용의 다른 입구를 확보하는 대신 정면 현관에 경사면 설치를 의무화시켰다.

더 간단하고 돈도 들지 않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와 같은 시책에 쏟아 넣은 비용과 노력은 장애인의 물리적인 불편함을 경감한다기보다 오히려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켜져야 하는 것은 장애인의 '패기'이고 그것을 위해 자연의 불평등을 극복하고 비장에인과 같이 버스에 타거나 건물의 정면 현관을 출입하거나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이려고 했던 것이다. p433.

 

이쯤이면 선진국과의 거리감이 아득해진다. 그럴수록 지금 우리 사회에서 깊이 음미해야 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 사회와 정부는 더 이상 장애인을 부담스러운 폐품으로 방치해 두거나 감추어 두려고 하지만 말고 재활용을 위한 투자의 대상임을 인식하고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 인적 재활용을 위한 투자 보다 더 나은 투자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물은 자기 몸의 한 부분을 특별히 많이 사용하고 덜 사용하는 정도에 따라 그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발달하거나 퇴화한다는 용불용설(用不用說)이란 말처럼 장애인에게 해당되는 말은 없을 것 같다. 우리 장애인 스스로도 우리 몸의 한 부분이 부족하다면 다른 부분을 활용해서 충분히 보완해 살아 갈 수 있고 사회 속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도록 더한층 노력해 나가야 한다.

장애인들이 기를 펴고 일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는 사회가 국민 모두에게 복지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이유(나의 신앙관)                                                      역사 속의 장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