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울타리를 넘어서 세상 속으로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서 매일같이 온 동네를 누비듯 산책하고 매주일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는 생활을 한지 수년이 지나는 사이에 거의 모든 사람들과 마주치면 인사 나눌 정도로 친숙해졌지만, 그토록 늘 바라는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한 채 아쉬움은 더해 갈 뿐이었다.

설사 사람들이 말을 걸어오더라도 언어장애 때문에 무조건 회피하기 일수였고 말하고 싶어도 걷고 있는 거리의 분위기가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들게 했다. 그럴수록 친구를 갖고 싶다는 오랜 기도 제목은 더욱 간절하게 이어지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러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과제를 놓고 기도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어머니나 동생들 그리고 온 친척들은 날 위해 존재하는 듯이, 사랑과 보살핌을 쏟아 주었기에 장애란 불편함을 거의 못 느끼다시피 생활해 나갈 수 있었지만, 언젠가는 내 분신인 어머니마저도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잃을 수밖에 없고, 동생들 역시 자신들의 길을 갈 수밖에 없기에, 나의 앞날에 대한 염려는 철이라는 것이 들어갈 수록 짙어져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81년 봄에는 자립을 위해 그리고 나의 앞날을 주님께서 맡아 주실 것을 간절히 구하려고 40일 아침 금식 기도를 드렸다.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상태에서 일부를 떼어 내 주님께 맡기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몇 번이나 해가 바뀌어 갔어도 나의 현실은 조그만 변화도 없이 똑같은 생활이 빠르게 반복될 뿐, 금식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조차도 뇌리 속에서 희미해지고 말았다.

 

88년 4월, 막연한 염려가 마침내 현실로서 나타났다. 무쇠처럼 항상 건강하시다고 자랑하던 어머니가 아침에 장독을 옮기시다가 허리를 다쳐 [디스크]에 걸려서 며칠을 병원에 입원하시는 엄청난 사태가 내게 주어졌다.

그 후 얼마 동안을 공기와도 같은 존재인 어머니가 몸을 자유롭게 쓰실 수가 없게 되어 큰 어려움을 겪어야만 되었다. 숨막힐 것 같은 현실의 그 공백을 무엇 하나도 혼자서 제대로 못하던 부자유한 내 몸으로 메워 나가야 하는 상황은 늘 기도해 오던 자립을 더 열심히 간구하게 만들었다.

그 전부터 라디오에서 [남부 복지관]에서 실시하는 장애자 취업 교육 프로그램을 듣고 한번 참가하고 싶었는데, 어머니께서 다치시기 전에 그곳에 가셔서 상담하시고 오셔서 식사는 자신이 해결할 수 있었냐 한다고 하니,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걱정하셨지만, 나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도 한번 꼭 가보고 싶은 마음은 더해지게 만들었다. 마침내 오랜 생각을 실현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5월 말 과연 내게 합당한 것인지, 나를 받아 줄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상담을 하기 위해 복지관을 찾아갔다. 모두 강의식이라 어려울 건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켜 주셨다. 그렇지만 난생 처음 가족과 떨어져 집밖을 나서 5박 6일이나 생활을 하여야 한다니,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지 불안과 걱정이 앞설 뿐이었다.

그렇게 밀려 들어오는 불안과 걱정을 여호수아 1:5-6의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를 떠나지 아니 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라]라는 말씀에 의지해서 물리쳐 버리고 너도 장애자요, 나도 장애자인데 나라고 못 해낼게 무어냐고 마음을 먹기로 하고서 또박또박 다가오는 시간을 기다렸다.

 

5월 30일 오후 2시 남부 복지관, 어머니가 입소식을 하는 교실까지 데려다 주시고 잘 해보라는 말씀을 남기고 돌아가시자, 운명처럼 여기기만 하던 고독의 성을 뚫고 전혀 새로운 세계에 들어선 것이었다. 자신이 장애자이면서도 장애자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다시피 해 왔었는데, 처음으로 그 삶 속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한없는 기대와 두려움을 안고서...

전혀 낯설은 사람들과 입소식을 마치고 배정 받은 방을 찾아가는데 복도에서 뜻밖에 한 동네에 사는 정우 청년을 만나 정말 반가웠다. 워낙 걸음이 늘려 뒤쳐져 방을 찾아 들어가니 한 방에 배정된 정우는 이미 맡아 놓기라도 한 듯 좋은 침대를 쓰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바로 '여호와이레'라고 하는 것이구나 했다.

그러나 2층 숙소에서 1층의 강의실과 식당 그리고 아침 체조를 하는 현관 마당을 하루에도 몇 번씩 다녀야 하는데, 내 걸음으로 도저히 따라 다닐 수 없었다. 내게는 너무 무리여서 휠체어를 빌려 달라고 해 보았지만, 이해를 못하고 거절하고 말아 할 수 없이 시간을 맞추기 위해 남보다 먼저 움직이기로 했다.

아침 체조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남보다 일찍 일어나 현관으로 나가야 했고, 체조나 강의를 마치면 식사시간까지 숙소에 올라가서 쉴 수 있는 시간에 있었지만, 오르내리기가 힘들고 시간을 다 잡아 먹어서 아예 식당에 가서 기다려야 했다.

말이 자유로웠으면 적절히 도움을 받아 가며 모든 일들을 훨씬 쉽게 할 수 있었을 것인데 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언어장애라는 것을 같은 장애인이라는 세계 속에서 깊이 느껴야 하다니, 더 이상한 장애인이 되어 버려서 불편과 고독감을 맛보아만 했다.

꼭 필요한 도움을 청하는 최소한의 대화만이 고작일 뿐이었다. 사실 말벗을 얻고 싶어서 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건만, 말이 제대로 안 나오고 기껏 애써서 말을 걸면 피해 버리는 사람이 많아 더욱 실망케 만드는 것이었다.

 

셋째 날이 되자 아무래도 잘못 왔다는 생각이 더욱 짙게 들었다. 장애 정도의 차이가 너무 심해 도저히 따라갈 수조차 없을 뿐 아니라, 집에서처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신세만 져야만 하게 되어, 더 이상 있어야 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회의가 일어서, 어머니를 불러 말씀 드리니 반대하시던 어머니께서 이왕 왔으니 며칠 더 참고 끝까지 견디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또한 수위 아저씨도 나보다 더 심한 사람도 지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 주어서 용기를 얻었었다. 그래서 각오를 새로이 하고서 방으로 다시 올라갈 수 있었다.

마침 수요일이어서 저녁에 기도회로 모이자는 것을 듣고 찾아가니 벌써 끝나 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 내 모습을 애처롭게 본 이덕자자매가 나가던 척추장애자인 장옥렬형제를 불러서 날 위해 기도를 더 해 주자고 해서 셋이 돌아가면서 기도하게 되어,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면 장형제의 방을 찾아가고 하게 되었다. 그는 온 정신을 집중해 들어주어 마음놓고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중요한 말을 해야 할 때는 미리 그를 찾아가 얘기를 해 놓아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어디에 가서나 그렇게 하고 있다.

처음엔 어떻게 5박 6일을 채울지 까마득해서 어서 날이 가기를 고대했지만, 힘든 일과를 함께 하면서 며칠을 지내자 벌써 깊은 정이 들어 날이 가는 것이 아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마지막 날 취업 상담을 여러 동료들과 함께 했는데 내 신체 조건으로써는 취업할 수 없다고 하면서 동료들에게 나에 대해 물어 보고는 "장애 정도에 비해 독립심이 아주 강하다"는 결론을 내려 주는 것이었다. 그것을 듣기 위해 그 어려운 결단을 하고 5박 6일간 온힘을 다해 쫓아 다녔던가?

아무튼 아무리 불가능하게 여겨지게 하는 것일지라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열심을 다해 추진할 때 모두 가능한 것으로 되어 버린다는 것을 깊이 체험한 것이 값진 수확이었다.

 

5박 6일간의 큰 일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감사함과, 커다란 도전을 마침내 해냈다는 성취감에 개선 장군이라도 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왔지만 현실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편찮으시고 좁은 내 방이 더욱 좁게 여겨질 뿐이었다.

운명이라도 바꾸어 놓을 듯이, 정말 열심히 쫓아다니며 많은 새로운 경험을 한 긴 시간을 보낸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바꿔어지지 않은 나의 현실은 숨막힐 것 같은 현실에서 잠깐 외출했다 돌아온 것처럼 여겨지게 만들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로 그렇게 열심히 움직인 결과, 반쪽이 되어 버린 몸과 허망하기 짝이 없는 마음으로 일주일을 지쳐서 보냈다.

열흘만에야 겨우 회복이 되고 똑같은 현실에 다시 적응하게 되었는데, 뜻밖에 전화가 나에게 왔다고 받으라는 것이었다. 내게 전화가 오다니 하며 받아 보니, 장옥렬형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전화를 받는다는 건, 언어장애 때문에 생각하지 못했었던 터였는데 신기하게 통화가 잘 되었다. 그 전화야말로 내 고독의 성을 뚫고 들어온 서광과도 같이 여겨지게 했다. 확실히 변한 게 있었구나.

어떻게 하면 그와 다시 만나 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마치 장애자들과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더욱 들게 해 주었다. 내게 마땅한 시설이나 프로그램을 찾아보려 전화도 해보고 애썼지만, 모두 조건이 안 맞아 철저히 격리되어 버린 듯 더욱 낙담스럽기만 했다.

 

그런 심정으로 한 달을 보내다가, 라디오에서 장애인 여름 캠프 안내가 나와서 베데스다 선교회에 전화로 신청했더니, 바로 접수가 되자 어머니가 기쁘셔서 무심결에 "길이 열렸다"라고 외치셨다. 그것은 내 앞길을 암시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동생들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가는 걸로 여기던 여름 캠프를 이제 나도 간다니 꿈같이 여겨지게 했다.

8월 9일 무던히도 더웠던 그 여름의 아침, 집결지에 도착해서 다시 어머니와 작별하자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한 버스에 타고 캠프 장소인 여주의 대신 고등학교로 향했다. 막상 도착해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일반 학교라서 시설이 나쁠 것으로 짐작하고 간 것이었지만 계단 투성이라 장애자들에게 최악의 조건이었다.

스스로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봉사자들이 헌신적인 수고를 해줌으로써 염려했던 모든 것을 행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보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때까지는 나 같은 사람의 문제는 가족들만의 일이라고 여겨 왔었는데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것이었다.

내가 정말 바라는 것은 자립을 모색하는 것이기에 선배와 동료들과의 지속적인 만남을 이어줄 외부와의 통로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처음 받아 본 베데스다 회보에서 재가 장애인 팀을 5월에 창단했다는 것을 보고서 내가 찾으려던 것이 이것이구나 했다. 10월말에 열린 모임에 장옥렬형제를 소개해서 그의 차를 타고 가게 되었다. 어머니의 몸도 거의 완쾌되어서 88년 한해동안에 난생 처음 시도한 두 가지 모험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어 주셨던 것이다.

 

조금만 낯선 분위기에서도 긴장되어 몸이 더 말을 안 듣고, 말을 하려면 흥분되어 발음이 더 나빠지기 때문에 처음에는 구석에서 가만히 듣기만 하면서 자세를 바로 하려고 급급했다. 모임을 거듭 참가할 수록 언어 장애까지 지닌 뇌성마비 장애란 다른 장애 유형에 비해 사회적 관계에서 훨씬 불리하다. 외모상으로 평가 절하 당하기 쉬워서 장애를 심하게 느끼게 해 주었다.

내가 객관적으로 볼 때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여겨질 정도니 오히려 말벗이 되어 알아듣는 게 신기하다는 감사한 마음이 들게 했다. 여러 사람들을 대해 보면서 느낀 것은 나에 대해서 신뢰하는 만큼 집중해 귀 기울려 주고, 또 나에 대해서 이해하는 만큼 내 말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알리고 의사를 표현해야 필요가 있다고 깨닫게 했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긴장이 덜 되고 훨씬 발음도 나아져 자연스럽게 대화도 나누며, 잘 어울릴 수 있게 되어 갔다. 그래서 새로운 회원들이 눈에 띄게 늘어갔는데도, 스스럼없이 먼저 말을 걸고 사귈 수 있을 만큼 발전되었고, 또 오래 만에 온 친척들도 신기하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양동춘전도사님과 팀장인 백정금자매를 비롯한 모든 회원들이 부족한 내 모습을 감싸주고, 온갖 시중을 해 주며 알아듣기 힘든 내 말을 알아들으려고 끈질긴 노력을 쏟아 준 결과였다.

그렇게 매 달 모임에 나가게 되었고, 한 번 나가게 되자 나갈 기회가 계속 생기게 되었다. 꿈같이 여기고 있어야 했던 전국적으로 유명하다는 곳을 거의 가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