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아가](雅歌)

(민음사, 2000)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장애인를 다룬 작품이라는데 끌려서 읽게 되었다.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란 부제처럼 회상에 의해 당편이란 장애를 지닌 한 여인의 삶을 이야기한다.

작가의 고향에 실재했다는 당편이란 여인을 실마리로 소설적 상상력으로 창조와 변형을 거쳐서 장애인의 삶을 표현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작가의 세계관의 의해 표현된 장애인관이 궁금했었다. 그것은 이 사회의 보편적 장애인관일 수 있기 때문에...

해방 이듬해 어느 문중 마을에 형세가 가장 좋았던 녹동댁에 사람인지조차 분간이 안 가는 어린 생명체가 풀씨처럼 버려졌고 인정 많은 녹동어른이 거두어들인다. 제 몸도 제대로 가누기 힘든 당편이와 함께 살게 될 때의 불편함에도 "...너들하고 한 쌈에 여주라(넣어주라)... 타고난 게 들쭉날쭉해도 이래저래 빈주랴(맞춰) 어울래 사는 게 사람이다."라는 녹동어른의 한마디에 한 식구로 살게 된다.

손이 불편해서 식사하기 힘들어하는 걸 보고 밥과 반찬을 비벼서 "당편이 밥죽"이란 걸 만들어 해결해 준다. 그런 식으로 그 몸에 맞게 생활하게 해주며 또 그 몸에 맞는 일거리들을 저마다 찾아 준다. 온전치 못한 그의 일거리란 여러 기능들의 틈새를 메워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녹동댁에 가늘고 긴 뿌리를 내리게 된다.

(작가는 막연히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서 그렇다고 했지만 그가 묘사한 당편이는 뇌성마비 2, 3급쯤에 정신지체가 약간 수반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역시 지체장애인을 보면 으레 소아마비라고 하는 일반적인 상식 수준이다.)

당편이는 녹동댁에서 안정된 생활 속에서 몸이 자라면서 몸의 기능들이 보다 나아져서 웬만큼 일을 따라 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존재로서 살아가게 된다.

그런 안정된 생활도 시간이 흐르면서 몰락해 가던 녹동댁이 해체되어 술도가에 맡겨지면서 여러 집으로 떠도는 신세가 된다. 결국 마을 사람들이 의논한 끝에 수용 시설에 보내지게 된다.

온전치 못한 사람들이 온전한 사람들과 정도에 따라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던 부락공동체에서 70년대에 들어서면서 흠결(欠缺)로 여겨지게 된 온전치 못한 사람들을 사회 미화작업으로 양파 껍질처럼 벗겨져 나가게 된 결과라고 하고 있다.

시설에 들어갔던 당편이가 1년이나 지난 뒤에 문중 마을에 나타난다. 어떻게 해서 수용시설을 빠져 나오게 되었는지 풍문과 추측으로 그 당시 악명 높았던 수용시설을 탈출하는 틈에 섞여서 나오게 되었으리라고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인정으로 연명하다가 거의 버려져 있던 향군회관에 거처를 마련해 주고 거택보호 대상을 받게 되어 구걸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얼마 뒤 향군회관에 늙은 건어물 행상이 들어와 한쪽에 눌러 앉아 좌판을 펼쳐 놓고 장사를 시작한다. 부락공동체에서 건어물 행상은 주로 경증 장애인이 맡아 했었듯이 그도 경증 장애를 지닌 홀아비였기에 당편이와 잘 어울리게 되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게 된다.

어느 해 단오날, 그 동안 모은 돈으로 한껏 차려 입고 나들이를 한다. 오르락내리락, 기우뚱 철퍼덕하는 요란한 걸음걸이가 춤을 추듯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행복한 한 쌍"이 봄 꽃놀이를 가는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흐뭇해졌다고 회상한다.

그 뒤로 동정과 호기심의 대상으로 지켜보던 당편이를 더 이상 특별한 존재로 보지 않게 되었고, 살기 바빠진 80년대의 삶 속에서 잊고 지내게 되었다.

서울에서 전언(傳言)에 의해서만 당편이에 대해 이야기하던 작가도 당편이 소식을 들을 수 없게 된다. 고향 동창회에 갔다가 고향 동창들도 까맣게 잊고 있던 당편이 소식을 부면장을 지내며 당편이를 돌보아 주던 집안 아저씨에게 묻고서야 듣게 된다.

건어물 영감이 죽자 당편이가 찾아와서 수용시설에 보내 달라고 했단다. 전에 수용시설에 보내 주는 일을 해서 마음이 아팠었기에 말렸지만 마을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우기며 보내 달라고 해서 보내 주게 되었다고.

그 단오날 화려한 외출 이후 마을 사람들에게서 멀어져 가면서 건어물 영감에게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그가 죽자 마을에 속한 존재가 아님은 발견하게 되자 수용시설을 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편이가 처음 녹동댁에 받아들여지던 그 시절만 해도 부락공동체의 구조와 심성에는 당편이와 같은 소위 온전치 못한 존재들이 들어앉을 자리가 있었고, 녹동어른은 그걸 공인해 주었을 뿐이었다고 하듯이 그 시절의 부락공동체를 그리워하면서 이 작품을 쓰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관점에서 당편이를 이야기했기에 당편이는 완전히 수동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가엾은 존재로 그려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장애인의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는 일은 장애인 작가가 담당해야 하는 몫일 것이다.

온전치 못한 사람들에게 사회적 성원으로 허용하던 부락공동체가 해체되고 온전한 사람들만이 치열하게 생존경쟁을 벌이는 새로운 사회에서 도태되었던 온전치 못한 사람들이 장애인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온전한 사람들보다 몇 배나 더 힘든 투쟁과 노력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만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회에서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 문학의 사명일지 모른다. 삶의 진실이 담긴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