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

(야훼 述, 이부영역, 집문당)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되고 밖의 현상으로 나타나며, 인격 또한 무의식적인 여러 조건에 근거하여 발전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형성의 과정을 묘사함에 있어 나는 과학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을 과학의 문제로서 경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과학이란 의식에 속한다. 그것처럼 사람이 안다고 하는 것, 즉 세상 만물에 대해서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의식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은 그 의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 의식으로 아는 것보다 의식 밑에 숨겨져 있는 것이 훨씬 많이 있다. 그것을 무의식이라고 하고 있다. 흔히 빙산의 일각이란 수면 위로 나온 부분은 전체의 7분의 1이고 물 속에 숨겨져 있는 부분이 7분의 6인 것처럼 의식이란 무의식의 일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난 한 부분일 뿐이다.

사람이 의식에 상주시킬 수 있는 용량이 한정되어 있어서 잊혀지게 된다. 그렇지만 자신이 경험되어진 바가 완전히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으로 이동되는 것이다. (윈도에서 파일을 삭제하면 휴지통 폴더에 쌓이는 것처럼. 그러나 사용자가 의식적 판단에 따라 복구하거나 완전히 삭제해 버릴 수 있지만, 무의식은 자신이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 다르다).

무엇인가를 무의식적으로 하게 되었다고 할 때나, 평소에 까막히 잊고 있던 일들이나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이 꿈속에서 나온다는 것은 무의식의 작용이다.

따라서 사람의 행위를 설명할 때는 사람의 의식과 함께 그 밑에 숨겨져 있는 무의식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을 발견해 낸 사람이 프로이트이다. 대부분 프로이트나 정신분석에 대해 어느 정도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칼 융(1875-1961)이나 분석심리학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융은 정신의학을 연구하다가 프로이트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어 함께 정신분석학을 연구하게 되었으나 프로이트가 개인의 모든 행위를 에로스(성본능)으로만 설명하는 등 무의식을 지나치게 에로스로 국한시키는 것에 반발해 독자적인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무의식을 보편적인 영역으로 확장시켰으며, 무의식도 개인적 무의식과 더 깊이에 있는 집단적 무의식으로 구분, 보다 심화시켰다. 분석심리학이라는 새로운 학파를 창시하게 되었다.

개인적 무의식이 개인의 경험이 축적된 것이라면 집단적 무의식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경험되어 온 象徵(상징)들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여러 신화 속에 나오는 상징들이 그것이라고 한다.

이 책은 출판사에서 융의 자서전 형식으로 기획했었는데, 팔십 고령이어서 융이 구술해 주는 것을 그의 제자이자 오랜 비서인 야훼가 받아 적어 정리해서 다시 융의 확인을 거쳐서 쓰여졌다. [만년의 사상] 장은 그가 직접 써서 덧붙쳤다.

이렇게 해서 회상, 꿈 그리고 사상이라는 제목처럼 명실공히 완벽한 회고록이 된 것이다. 회상이 의식의 경험이라면 꿈은 무의식의 경험이고 사상은 그 둘을 결합시킨 학문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책 속으로

 

인류에게 던져진 결정적인 물음이란 그대는 무한한 것에 연계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시금석이다. 무한한 것이 본질적인 것임을 내가 알 때라야만 나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닌 쓸데없는 일에 관심을 두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모를 때 나는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이런 저런 성격들 때문에 무엇인가를 이 세상이 인정하도록 고집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고집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나의" 재능이나 "나의" 멋 때문일지 모른다. 인간이 그릇된 소유를 고집하면 할수록 그리고 본질적인 것을 느낄 수 없으면 없을 수록 그의 삶은 더욱 불만족스러운 것이 된다. 그는 제약된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제약된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선망과 질투를 만든다. 우리가 이미 이승에 삶에서 무한한 것에 결속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이해할 때 우리의 욕구와 자세가 바뀌게 된다. 결국 인간에게 합당한 것은 오직 본질적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갖지 않았다면 인생은 낭비된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무한한 것이 그 속에 표현되는지 안 되는 지가 결정적인 것이다.

무한한 것의 느낌은 다만 내가 극단적으로 유한할 때 도달할 수 있다. 인간의 최대의 제약은 自己이다. 그것은 "나는 다만 그것일 뿐이다"는 체험 속에 나타난다. 내가 자기 안에서 가장 제약되어 있다는 의식만이 무의식의 무한성에 연결될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에서 나는 나를 유한하면서도 영원하며, 이것이면서도 다른 것으로서 경험한다. 내가 나를 고유한 一回的 존재로서 나의 개인적인 결합 속에서 궁극적으로 제약되어 있음을 알게 되면서 나는 또한 무한함을 의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그러나 다만 그럴 때만 이것이 가능하다.

인생의 공간을 넓히고 합리적인 지식을 어떤 경우에도 증가시키는 시기에서는 자기의 일회성 유한함을 의식하는 것이 가장 강하게 요구된다. 일회성 유한성은 동의어이다. 이것을 인식하지 않고 무한을 지각할 수 없다. 그러니 또한 의식이라는 것도 없고 단지 다수 군중의 열광과 정치적인 권력의 위세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과의 망상적인 동일시가 있을 뿐이다.

우리의 시대는 모든 중요성을 현세적 인간에 미루어 왔다. 이로써 인간과 그의 세계의 마력화(魔力化)가 초래되었다. 독재자들의 출현과 그들이 가져다 준 온갖 재앙은 너무도 영리한 지성인들이 지닌 근시안 때문에 인간에게서 내세적(來世的)인 것을 박탈한 사실에 그 원인이 있다. 인간은 그런 근시안적인  사람들처럼 무의식성의 재물이 되어 버렸다. 인간의 과제란 전혀 그 반대일 것이다. 무의식에서 엄습해 오는 것에 관해서 무의식인 채 있거나 동일시하지 않고 그것을 의식화하는 것이 그의 과제이다. 무의식적인 상태에 머무르거나 무의식과 동일시하는 것은 의식을 만들어 가야 할 그의 사명에 불충실한 것이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한, 단순한 현존에 어둠에 불을 붙이는 것은 인간실존의 유일한 의미이다. 심지어 무의식이 우리에게 작용하듯 우리의 의식의 증가가 무의식에 작용하고 있음을 정할 수 있다. p368-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