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클의 [극한상황 속의 인간심리분석](심일섭편역, 인간)

 

 

 

 

원제가 {어느 심리학자가 체험한 죽음의 수용소에서}이듯이 유명한 심리학자인 프랑클박사가 2차대전 나치의 아우슈비츠 등 여러 강제수용소에서 체험한 일종의 회고록이다.

수용소가 어떤 상황이었나를 말해 주는 한 대목을 보면 "찢어진 구두에 진훍투성이가 된 상처 난 발의 아픔에 울다시피 하면서 종대로 길게 늘어선 대열에 낀 채 수용소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작업장까지는 매서운 추위였다. 살을 에는 역풍 속을 비틀거리며 헤쳐 갔다." 그와 같은 생활이 몇 년이나 반복되었다고 한다.

그런 극한 속에서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나는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 인생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고 했다 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옳은가?
여기서 필요한 것은 '생명의 의미'에 대한 질문의 관점(觀點)을 바꾸는 일이다. 즉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직도 기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인생이 무엇을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 점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우리가 인생의 의미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물음을 받는 자로서 체험을 얻는 것이다. 인생은 우리에게 날마다 시간마다 질문을 던지고 있고 우리는 그 물음에 탐색이나 말뿐이 아닌 올바른 행위로 응답해야만 할 것이다. 인생이란 결국 인생의 의미의 문제에 바르게 대답하는 일, 인생이 각자에게 부과하는 사명을 다하는 일, 나날의 의무를 행하는 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니체가 한 "왜 사는가를 알면 모든 삶의 고뇌를 참아 낼 수 있다."는 말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아사지경에 있던 죄수 하나가 창고에 뛰어들어 감자를 훔친 일이 생겼다. 그 사실이 발각되었고 수용소 당국은 범인을 색출해 내도록 요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죄수 전원을 하루 죄일 굶기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2천 5백명의 동료들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면서도 그 한 사람을 교수대로 보내기 보다 하루를 굶는 것을 택했다.

바로 그 굶던 날 저녁, 불쾌한 심정으로 누워 있는데 정전(停電)이 되어 불쾌감은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그 막사의 죄수 대표가 죄수들의 마음을 집중시키기 위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이긴 하지만 죽는다는 참된 원인은 바로 자기 포기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자기 붕괴에 의한 희생을 막을 수 있는가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듣고 싶다고 나(프랑클)를 지명했다.

프랑클이 말한 가운데 인상 깊은 몇 대목,
"나는 컴컴한 막사 안에서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가엾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당하고 있는 상황의 중대성을 직시할 것과 체념하지 말 것, 우리의 싸움이 승전의 가망성이 없다고 해서 싸움의 의미와 존엄성마저 잃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냉철히 인식하도록 간곡히 부탁했다.

... 이 난국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를 찾고 있는 누군가의 눈길이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잊을 수 없는 벗, 사랑하는 아내, 한 사람의 살아 있는 자와 한 사람의 죽은 자...... 그리고 우리의 신(神)이라고.

... 우리들은 그들에게 실망을 주어서는 안되며 또한 우리는 슬퍼하지 않고 비굴하지 않게 자랑스럽게 죽어 갈 줄 아는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끝으로 나는 우리들의 희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우리들의 희생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 세상에서는 언뜻 보기에 희생이란 정치적 이념에 의한 자기 희생이든 남을 위한 자기 희생이든 본질상 득도 의미도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모든 희생은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종교적인 의미에서 신앙을 가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죽음을 견뎌 내면 한층 더 강해진다."(니체)

이미 되어져 있는 과거나 현실이 될 미래는 모두가 인간의 책임하에 주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순간부터 다음 세계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인생이다. 273.

모든 자유는 [∼으로부터의]의 자유와 [∼에로]의 자유가 있다. [∼으로부터의]의 자유는 '충동적 존재로부터'의 자유를 뜻하고, [∼에로]의 자유는 '책임적 존재에로'와 '양심적 존재에로'의 자유를 뜻한다.

내 의지에 대해서는 '주인'이 되고, 내 양심에게는 '종'이 되라. 277

프랑클은 (강제수용소에서 당당하게 살다가 무참히 죽음을 당한 의사들을 위한 추도사에서) "어떤 의미에서 강제수용소를 통과하는 것은 하나의 큰 '시험', 중대한 시험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모든 것이 무섭게 박탈당한 상태에서도 "인간은 인간으로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입증해 준 교훈" 속에서 "인간은 무엇이며, 그리고 인간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판가름해야 할 엄청난 시험이었다고 알려주고 있다.

부연하면서 수용소에서 인간에게 없어도 괜찮을 것을 모두 박탈되었으며, ... 금전.명성.행운은 다 없어졌었다. "허지만 그 때에는 다만 '所有'하지 않고 있었을 뿐, 人間은 '人間이어야 한다'는 것만은 아무래도 남아 있었다"고 하였다. 정녕 남아 있는 것이라곤 '人間 그 自體로서', 그 인간은 고통과 아픔의 용광로에서 人間의 본질로 즉, 인간성으로 변화되어 감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프랑클의 이와 같은 통찰은 곧 "인간이란 人間의 본질로 부단히 결단해 가는" 책임적 존재자라는 實存分析(실존분석)의 人間觀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란 결국 가스 독살실을 발명한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같은 인간에 의해 발명된 그 가스실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머리를 똑바로 들고 [주의 기도]를 드리며 들어가는 존재라고 프랑클은 거듭 강조한다.

"전혀 잘못한 것이 없다 할지라도, 옳은 것을 行하지 못하는 것이 罪(죄)이다."

참되게 他者(타자)나 이웃을 용서한다는 것은 마치 '기도의 신학'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올바른 기도는 결코 무엇을 갈구하거나 神과 흥정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성취된 것에 대한 감사요 응답인 것이다. .."신에 대한 신앙은 인간의 德이 아니라 신의 축복이며 은총이기 때문이다." pp284-7.

科學의 존엄성에서 발견된 진리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종교에 기여할 수 있는 가치를 박탈하는 것과 같다. 과학이 독립적으로 연구하여 얻어진 결과만이 참되게 神學을 위해 유익한 기여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294

과학이 자기 자신을 뛰어 넘어 스스로를 존재론적 안목으로 통찰해 보지 않고는 자기가 내놓은 결과를 '과학적으로' 측정하거나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를 발견할 수 없게 된다. 그 때문에 과학의 현상학적 또는 경험적 결과가 存在論的 展望(존재론적 전망)과 얼마나 병행해 가는지를 알기 위해서, 협소한 과학의 한계를 뛰어넘도록 요청 받고 있을 따름이다. 295

어느 詩人의 시구처럼, 폭풍우 앞에서 작은 불은 쉬 꺼지지만 큰불은 더욱 거세게 타오르는 것처럼, 장애물과 재앙에 부딪칠 때 약한 신앙은 소멸되지만 강한 신앙은 더욱 굳세어진다.

그 참혹한 수용소의 경험을 통해, 인생에게 있어서 괴로움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과, 또 그러한 괴로움은 앞으로도 계속 얼마든지 닥쳐오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프랑클의 분석에 의하면 이러한 [한계 없는 고통] 속에서는 자기 보호의 무의식적 본능으로 文化的 冬眠狀態(Cultural hiber nation)에 들어가지만, 마지막까지 남아 끊임없이 활성화되는 본능은 [먹는 것]과 [政治]와 [宗敎信仰(종교신앙)]이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죽음의 골짜기를 함께 무수히 통과해 온 친구가 숨을 거두는 순간 그의 살을 도려내어 깡통에 끓이는 그 [식욕], 그리고 이 불의로운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언제까지 계속될 것이며 언제 끝나고 또 어떻게 심판될 것인가 하는 [政治感(정치감)], 수용소의 철조망을 무한히 넘어 가서 절대자에게 호소하며 위안을 받고 용기를 얻어 최후의 순간까지 의젓하게 人間의 존엄성을 지켜 가게 하는 저 영적 자유자의 엄숙한 [信仰]이 마지막까지 남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20:1이라는 요행의 관문을 통과하여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모든 경험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온갖 괴로움을 겪고 난 이 마당에 이르러서 "이 세상에서 두려워할 것이라고는 자기가 믿는 神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경이로운 勇氣(용기)"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