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와 진보의 대립. 어느 분야, 어느 시대에도 이 두 노선은 대립하고 갈등하는 가운데서도 서로를 자극하고 부추겨 가고 있다. 보수라는 노선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전통을 현실보다 존중하기 때문에 항상 현실을 전통의 척도에 맞추어서 해석하고 판단하려고 한다. 반면 진보라는 노선은 전통을 현실에 맞추어서 해석하고 판단하려고 한다. 관점의 차이일 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전통이란 역사의 긴 과정을 거쳐오는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얻어진 다양한 경험 중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알맞은 것들이 결합하여져 갔기 때문에 인생과 사회의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란 처해 있는 시대적 사회적 환경이 급속하게 바뀌어 갈지라도 본성은 좀처럼 바뀌기 힘든 존재이다. 그래서 전통이란 것은 항상 설득력을 갖고 있고 보편성이 존중되게 마련이다.
그런 전통이 강할수록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새로운 현실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법이다. 현실이란 전통이 예측한 바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전통은 그런 현실을 용납할 수 없고, 현실은 그와 반대로 전통의 보편성을 인정할 수 없다.
서로 양보하면서 최대 공약수를 찾아야 하는 데 개인적 취향과 사회적 분위기에서 자연히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그것을 개성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책이 두꺼워서 지루해 읽다 말다 하며 오래 끈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마음』(2012, 왕수민역, 웅진)을 뒤늦게 재미를 들여서 읽게 되었다.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심리를 깊이 연구한 책인데, 충성심/배반, 권위/전복, 고귀함/추함, 배려/피해, 공평성/부당성, 자유/압제의 가치관 가운데 보수 쪽은 비교적 고르게 높으면서도 앞쪽 사회적 가치를 우선시하는데 진보 쪽은 뒤쪽 개인적 가치에 유독 민감하다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사회적 위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반면에 진보주의자들은 사회적 배려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정치와 맞아떨어진다. 보수는 북의 핵무기 위협을 강조하는 반면 진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해로 나가 핵무기를 포기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보수는 안정적인데 진부하고, 진보는 이상적인데 불안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진보가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노예제를 폐지하고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소외층이 참정권이나 교육의 기회 등 정치 사회적 평등을 끊임없이 확대해 온 것은 불안한 진보가 견고하게 안정된 보수로부터 쟁취해 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 사회적 변동을 통해 불안해진 사회를 보수가 안정시켜 왔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보수와 진보는 상호보완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서로 경쟁하듯 양극단으로 치달으려는 정치사회적 경향이 우려스럽게 하고 있다. (2025.3)
1장 도덕성은 대체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요약
도덕성의 범위는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서양적이고, 교육 수준이 높고, 개인주의적인 문화에서는 도덕성의 범위가 몹시 좁다. 반면 사회 중심적 문화에서는 도덕성의 범위를 넓히는 경향이 있는데, 이로써 삶의 더 다양한 측면을 아우르고 통제한다.
사람들이 갖는 직감(특히 역겨움 및 경멸감과 관련된 것)은 때로 도덕적 추론을 진행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도덕적 추론은 때로 사후 조작과 다름없는 양상을 보인다.
도덕성은 아이들이 피해의 개념을 잘 이해하게 되었을 때 스스로 세워 나가는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틀림없이 문화를 통한 학습이나 문화적인 유도가 합리주의 이론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역할을 할 것이다. (69)
2장 도덕은 너무나도 감성적이다 요약
인간의 마음은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기수(통제된 인지 과정)가 코끼리(자동적 인지 과정)의 등에 올라 타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기수는 코끼리의 시중을 들어 주도록 진화했다.
기수가 코끼리를 시중드는 모습은 사람들을 당혹감에 빠뜨렸을 때 목격할 수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사람들은 강하게 직감하고, 그 느낌을 사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사후 정당화의 근거를 만들어낸다. 설령 하인(추론 능력)이 아무 이유를 찾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와도 주인(직관)은 자신이 내린 판단을 바꾸지 않는다.
사회적 직관주의자 모델은 흄의 모델을 기초로 하되 거기에 좀 더 사회성을 불어넣은 형태이다. 사람들은 친구를 얻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 일평생 모질게 애쓰는데, 도덕적 추론도 그런 노력 중 하나이다. 내가 “직관이 먼저이고, 전략적 추론은 그 다음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진실이 무엇인지 밝혀내기 위해 사람들이 혼자 가만히 앉아서 하는 어떤 활동을 도덕적 추론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따라서 도덕이나 정치 문제와 관련해 누구의 마음을 바꾸고 싶다면, 코끼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 자신의 직관에 어긋나는데 그것을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하면, 그들은 전력을 다해서 빠져 나갈 구멍을 찾을 것이다. 내 논거나 결론에 어디 미심쩍은 부분이 없나 이유를 찾아내면서 말이다. 그리고 거의 백이면 백 그 노력은 성공을 거둘 것이다. (110)
3장 나는 바르다, 남이 잘못이다 요약
(분트와 자이언스가 말한 것처럼) 뇌는 무엇에 대해 항상, 그리고 즉각 평가를 내린다. (토도로프의 연구와 내재적 연관, 검사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사회적 정치적 판단은 순식간의 직관적 인상에 심하게 좌우된다.
우리의 신체 상태가 때로는 우리의 도덕적 판단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청결과 위생을 상기시키는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불쾌한 냄새나 맛은 사람들이 더 엄격한 판단을 내리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
사이코패스는 추론 능력은 있으나 느끼지 못한다(더불어 도덕적 능력도 심각하게 결핍되어 있다).
아기는 느낄 수 있으나 추론 능력이 없다.(그러나 도덕성 발달의 시초를 지니고 있다).
(디마지오와 그린의 연구, 그리고 최근 급증한 연구에서 나타나듯이) 정서 반응은 뇌에서 정해진 장소와 때에 맞추어 일어난다. (144-5)
4장 도덕은 표를 얻으려는 정치인과 같다 요약
우리는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강박적일 정도로 염려한다. 물론 이런 염려는 상당 부분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에 우리는 이를 눈치채지 못한다.
의식적 추론은 마치 대통령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공보관처럼 우리의 모든 입장을 자동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 안에 있는 공보관의 도움을 받아 종종 우리는 거짓말을 하고 남을 속이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는 자기 잘못을 너무도 잘 덮어 가리기 때문에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도 스스로가 잘못이 없다고 믿는다.
이성적 추론 능력은 우리가 원하는 결론이 있으면 갖은 수를 써서 그것에 도달하게 해준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싶을 때는 “내가 이것을 믿어도 될까?”라고 묻고, 무엇을 믿고 싶지 않을 때는 “내가 이것을 믿어야만 하나?”라고 묻는다.
도덕이나 정치 문제와 관련해 우리는 개인보다 집단을 염두에 두고 판단을 내릴 때가 많다. 우리가 팀을 지지하고 팀에 헌신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이성적 추론 능력을 활용한다. (182-3)
5장 편협한 도덕성을 넘어 요약
도덕심리학의 두 번째 원칙은 “도덕성은 단순히 피해와 공평성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가 이상에서 설명한 연구에 따르면, 서양적이고 고학력이고 산업화되고 부유하고 민주주의적인(WEIRD) 사회는 여러 가지 심리학 지표에서 통계적으로 열외와 다름없다. (여러 가지 도덕심리학의 지표에서도 그러하다). 더불어 내가 5장에서 밝힌 사실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WEIRD의 특성이 강한 사람일수록, 이 세상이 관계보다는 별개의 사물로 가득 차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도덕적 다원주의가 이 세상의 실상에는 더 잘 맞는다. 도덕의 범위가 문화에 따라 다르다는 것은 인류학에서는 기정사실이다.
보통 도덕의 범위는 WEIRD권 문화에서는 좁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이곳에서는 도덕의 범위가 대체로 자율성의 윤리(개인에 대한 피해, 압제, 사기 등과 관련한 도덕적 관심사)에 국한된다. 그러나 그 밖의 대부분의 사회를 비롯하여 WEIRD권 사회 내에서도 종교적이고 보수적인 도덕 매트리스 안에서는, 도덕의 범위가 (공동체의 윤리와 신성함의 윤리를 포함하면서) 더 넓어지는 경향이 있다.
도덕 매트리스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주지만, 그것은 다른 매트리스가 가진 논리(심지어 다른 매트리스의 존재까지도)를 못 보게 하는 면이 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세상에 하나 이상의 도덕적 진실이 있다는 사실을 헤이리는 데 무척이나 어려움을 느낀다. 사람을 판단하거나 사회를 운영하는 정당한 틀도 하나 이상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다. (214-5)
6장 바른 마음이 지닌 여섯 가지 미각 요약
도덕심리학의 두 번째 원칙은 “도덕성은 단순히 피해와 공평성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이다. 6장에서는 그 밖의 다른 도덕성에 그 밖의 다른 도덕성에 정확히 어떤 것들이 있는지로 이야기의 서두를 열었다.
도덕성은 여러 가지 면에서 미각과 비슷하다(일찍이 흄과 멩자도 그런 비유를 한 바 있다).
의무론과 공리주의는 ‘한 가지 수용체’를 지닌 도덕으로, 이것이 무엇보다 강력히 와 닿는 사람들은 체계화 능력은 높고 공감 능력은 낮을 가능성이 크다.
도덕에 대한 흄의 접근법은 다원주의적이고 감상주의적이고 자연주의적인 것으로, 현대 도덕심리학에는 공리주의나 의무론보다 이런 접근법이 더 훌륭한 지침이 될 수 있다. 흄의 구상을 복원하려는 첫 걸음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른 마음이 지니고 있는 다섯 가지 미각 수용체부터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모듈 개념을 통해 선천적 수용체에 대한 사고를 전개할 수 있다. 더불어 이 선천적 수용체가 일으키는 초기의 다양한 인식, 그리고 그것이 문화 속에서 다양하게 발전하는 양상도 살펴 볼 수 있다.
바른 마음의 미각 수용체가 될 좋은 후보로는 배려, 공평성, 충성심, 권위, 고귀함의 다섯 가지가 있다. (241-2)
7장 정치는 도덕을 어떻게 이용하는가 요약.
배려/피해 기반이 발달하게 된 것은, 무력한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적응 도전 과제에 임하면서였다. 이 기반 때문에 우리는 고통과 필요의 신호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또 이 기반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잔혹함을 경멸하는 경향을 보이고, 나아가 고통 받는 이들을 돌봐 주려는 마음을 갖는다.
공평/부정 기반이 발달하게 된 것은, 협동으로 보상을 얻되 착취는 당하지 말아야 하는 적응 도전 과제에 임하면서였다. 이 기반 때문에 우리는 누가 협동과 호혜적 이타주의에 훌륭한(혹은 나쁜) 파트너다 싶으면 그 신호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우리가 사기꾼이나 부정 행위자와 관계를 끊거나 그에게 벌을 주고 싶어 하는 것도 이 기반 때문이다.
충성심/배신 기반이 발달하게 된 것은, 연합을 구성하고 유지해야 하는 기반이 발달하게 된 것은, 하는 적응 도전 과제에 임하면서였다. 이 기반 때문에 우리는 누가 훌륭한 팀풀레이어인지에(혹은 그렇지 않은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이 기반 때문에 우리는 그런 사람에게는 신뢰와 보상을 주고 싶어 하고, 반대로 나 혹은 우리 집단을 배반하는 사람에게는 위해, 추방, 심지어 살인으로 응징하고 싶어 한다.
권위/전복 기반이 발달하게 된 것은, 사회적 위계 서열 내에서 인간관계를 잘 구축하여 모종의 이득을 거두어야 하는 적응 도전 과제에 임하면서였다. 이 기반 때문에 우리는 서열이나 지위의 표시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며, 타인이 자신의 지위에 맞게 잘 행동하고 있는지도(혹은 그렇지 않은지도) 민감하게 살핀다.
고귀함/추함 기반이 발달하게 된 것은, 애초에는 잡식 동물의 딜레마라는 하는 적응 도전 과제에 임하면서였으나, 병원체와 기생충이 득실대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더 광범한 과제 역시 후일 이 기반을 발달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고귀함/추함 기반에는 행동 면역 체계도 포함되는 바, 우리는 이를 통해 다양한 상징적 사물과 위험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사람들은 집단을 하나로 뭉쳐 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거기에 비합리적일 정도로 엄청난 가치(긍정적인 가치는 물론 물론 부정적인 가치도)를 쏟아 붓는다, 그런 경향이 나타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기반 때문이다.
7장의 논의를 거치는 동안 우리는 정치색의 양 끄트머리 분파들이 이런 도덕성 기반에 어떤 식으로, 또 얼만큼이나 기대는지도 살필 수 있었다. 좌파는 배려 기반과 공평성 기반에 주로 기대는 반면, 우파는 다섯 가지 기반 모두를 활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만일 실제로도 정말 그렇다고 하면, 좌파의 도덕성은 마치 ‘더 트루 테이스트’ 식당의 음식과 비슷하다는 뜻이 아닐까. 좌파의 도덕성은 고작 한두 개의 미각 수용체를 활성화시키는 반면, 우파의 도덕성은 충성심 권위 고귀함까지 아우르며 더 폭넓게 미각 체계를 자극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유권자들과 연결될 더 폭넓고 다양한 방법도 결국 보수적 정치인들이 손에 쥐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285-6)
8장 도덕적인 인간이 승리한다 요약
도덕심리학을 이용하면 1980년대 이래 민주당이 왜 유권자의 표심을 잡지 못해 그토록 애먹는지 그 답을 설명해 낼 수 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민주당 보다 공화당이 사회의 직관주의자 모델을 다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화당원들은 코끼리에게 더 직접적으로 말을 걸 줄 안다. 그뿐만 아니라 도덕성 기반 이론’을 더 잘 파악하고 있다. 공화당에서는 사람들의 미각 수용체 하나하나를 빠짐 없이 자극해 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8장에서 뒤르켐의 사회관이 어떤 것인지도 선보였다. 사회적 보수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이런 사회관에서는 개인보다는 가정이 사회의 기본 구성 단위가 되며, 질서 위계 서열 전통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이와 반대로 밀의 사회는 좀 더 개방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있다. 밀이 지향하는 사회에서는 다자가 뭉쳐 하나가 된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민주당원들이 추구하는 하나로 뭉치기보다는 다자로 나뉘는 것을 부추길 때가 많다. 그래서 민주당의 정책들은 곧잘 반역 전복 신성모독 등의 비난을 면치 못한다.
이어서 나는 자유와 공평성 관련 직관을 더 잘 설명해낼 수 있도록 ‘도덕성 기반 이론’의 일부 내용을 동료들과 함께 다음과 같이 수정했다.
도덕성 기반에 우리는 자유/압제 기반을 추가했다. 이 기반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배의 표시가 조금이라도 눈에 띄면 그것을 알아 차리고 의분을 느낀다. 불한당과 독재자에게 저항하거나 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다 같이 뭉쳐야 한다는 욕구도 여기에서부터 생겨난다. 이 기반을 잘 알면 자유주의자와 일부 보수주의자가 왜 “나를 짓밟지 마라”식의 반정부 감정을 가지는지는 물론, 좌파의 평등주의와 반 권위주의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공평성 기반에 수정을 가해 그것이 비례의 원칙에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했다. 공평성 기반이 호혜적 이타주의 심리에서 출발하는 것은 맞지만, 인간이 험담과 징계가 가능한 도덕 공동체를 만들어내고부터는 공평성 기반이 짊어진 의무가 훨씬 많아졌다. 사람들 대부분은 심층적인 직관 차원에서 인과법칙을 중시한다. 사기꾼은 벌을 받고 착하게 살아가는 시민은 응분의 보상을 받기를 사람들은 대체로 기대한다.
이렇게 수정을 가하자 근래 들어 민주당이 골몰해 온 커다란 수수께끼 하나를 이 ‘도덕성 기반 이론’을 통해 해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문제란 바로 왜 미국의 시골 주민과 노동 계층은 일반적으로 공화당에 표를 던지는 경향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재분배를 통해 국민들에게 좀 더 공평하게 돈을 나누어 주고자 하는 쪽은 오히려 민주당인데도 말이다.
민주당에서는 이들이 이렇게 자신의 경제적 이해에 반하는 식으로 투표하는 것은 공화당의 농락에 넘어간 때문이라고 곧잘 이야기 한다. 그러나 ‘도덕성 기반 이론’에서 보면, 시골 지역과 노동자 계층 유권자들은 사실 자신들의 도덕적 이해에 따라 투표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입맛은 ‘더 트루 테이스트’ 식당에는 맞지 않을 뿐더러, 나아가 자신의 나라가 피해자들을 돌보고 사회의 정의를 실현시키는 데만 매달리는 것도 원치 않는다. 뒤르켐의 사회관을 비롯해서 여섯 가지 기반의 도덕성과 세 가지 기반의 도덕성이 어떻게 다른지 이해를 못하는 한, 앞으로도 민주당은 사람들이 공화당에 투표하는 이유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책 1부에서 나는 도덕심리학의 첫 번째 원칙을 제시한 바 있다. “직관이 먼저이고 전략적 추론은 그 다음이다.”라는 것이다. 2부에서는 그러한 직관들 하나하나를 세세히 설명해 나갔고, 그 과정에서 도덕심리학의 두 번째 원칙을 제시했다. “도덕성은 단순히 피해와 공평성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이제는 이 다양한 도덕성 때문에 좋은 사람들 사이에 너무도 쉽게 편이 갈리는 모습을 살펴 볼 차례이다. 이렇게 편이 갈라지면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지는 않고 적대적으로 싸우기만 한다. 이제 우리는 도덕심리학의 세 번째 원칙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준비가 되었다. 바로 “도덕은 사람들을 뭉치게도 하고 눈 멀게도 한다.”라는 것이다.
9장 우리는 왜 그토록 집단적이 되는가 요약
증기 A: 중대 과도기를 통해 초개체가 만들어진다. 이제까지 지구에서 살아온 생명체의 역사는 ‘중대 과도기’의 본보기가 몇 번이고 되풀이된 과정이었다. 생물학적 위계질서의 한 차원에서 무임승차자 문제가 무난히 해결되고 나면, 그 다음 단계의 위계 서열에 들어서는 이전보다 더 거대하고 강력한 탈것(초개체)이 등장한다. 이러한 초개체는 집단 내 분업, 협동, 이타주의 등의 새로운 특성들을 지닌다.
증거 B: 공통된 의도를 통해 도덕적 매트릭스가 생긴다. 우리 인간은 공통된 의도를 가지고 다른 이의 머릿속 생각을 읽는 고유한 능력을 가지는데, 인간은 이 능력을 가지면서 마치 루비콘 강을 건너 듯 집단 내 아주 원활히 기능할 수 있게 되었다. 초창기 인간들은 이 능력을 바탕으로 서로 협동하고 분업을 이룬 것은 물론, 공통의 규범을 만들어 서로의 행동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도 잇게 되었다.
증거 C: 유전자와 문화는 공진화한다. 우리 조상들이 루비콘 강을 건너 서로의 의도를 공유하기 시작한 순간, 우리 인간의 진화는 양갈래 실이 엉키 듯 이루어졌다. 사람들이 새로운 관습, 규범, 제도를 만들어내면 이 집단적인 특성이 가지는 적응의 정도도 변화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로 인해 우리가 일련의 부족 본능을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어떤 집단에 속했는지 표시하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하며, 그런 표시를 한 다음 뒤에는 자기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과 우선적으로 협동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증거 D: 진화는 빠른 속도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인간의 진화는 지금으로부터 5만년 전에 속도가 멈추지도 느려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때부터 속도에 불이 붙었다.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는 최근 1만 2000년 사이에 가장 맹렬하게 이루어졌다. 인간의 본성이 5만년 전에서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인 만큼, 오늘날 지구를 살아가는 수렵 체집자를 보고 그들이 인간 본성의 보편적 모습을 대표한다고 할 수 없다.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해서 바른 자세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이해하려면, (지금으로부터 7만~14만 년 사이에 일어난) 극심한 환경 변화를 비롯해 (완신세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문화적 변화를 좀 더 부각시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인간 본성 대부분은 자연선택이 개인 차원에서 작동한 결과 형성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그렇지, 전부 그렇지는 않다. 9.11 사태 이후 숱한 미국인이 발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인간은 집단과 관련된 적응의 특성도 몇 가지 지니고 있다. 우리 인간은 이중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기적인 영장류이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보다 크고 고결한 무엇의 일부가 되려는 열망도 갖고 있다. 우리의 본성은 90퍼센트가 침팬지와 같고 10퍼센트는 벌과 같다. 만일 이 주장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받아들인다면, 사람들이 이집단적으로, 또 군집으로 행동하는 까닭을 훨씬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 마치 우리 머릿속에 스위치가 하나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될 정도이다. 조건만 딱 들어 맞으면 우리 안에 잠재한 꿀벌의 군집 능력을 활성화하는 그런 스위치 말이다. (395-7)
10장 군집 스위치 : 나를 잊고 거대한 무엇에 빠져들게 만드는 능력 요약
행복의 가설이라는 책을 집필하던 초반, 나는 부처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이 수천 년 전에 말한대로 행복은 우리 안에서 찾아오는 것이라고 믿었다. 내 맘 같지 않은 세상을 내 맘에 맞게 끼워 맞출 수 없으니, 나 자신과 나의 바람을 바꾸는데 진력해야 하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집필 작업이 막바지에 접어든 무렵, 그러한 내 생각은 싹 바뀌어 있었다. 행복은 사이에서 찾아오는 것이었다. 나 자신과 타인, 나 자신과 나의 일, 나 자신과 나보다 더 거대한 무엇, 이 둘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맺어져야 행복은 비로소 찾아온다.
이제 여러분도 이집단성의 외피를 비롯해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이중적 본성이 있음을 알게 된 만큼, 왜 행복이 사이에서 온다는 것인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집단 속에서 살아가도록 진화한 존재이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집단 내 경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와주기도 하지만, 소속 집단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타 집단과 경쟁하고 거기서 승리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이번 10장에서 나는 군집 가설이라는 것을 제시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군집 생물이다. 우리는 (특정 상황에 처하면) 개인의 이익을 초월하여, (잠시, 그리고 열광적으로) 자아를 잊고 자신보다 커다란 무엇에 빠져 드는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을 나는 군집 스위치라고 칭했다. 이 군집 스위치는 뒤르켐이 말한 호모 듀플렉스를 또 다른 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적인(통속적인) 세계 속에서 삶의 대부분을 살아가지만, 신성한 세계로 넘어가는 순간 그 짧은 시간 속에서 무엇보다 큰 희열을 맛본다. 우리는 “그저 전체를 이루는 일부”일 뿐이다.
군집 스위치를 켜는 방법으로는 흔히 세 가지, 즉 자연에 대한 경외심, 뒤르켐주의적 약물, 레이브 파티가 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옥시토신과 거울 뉴런에 대한 최근 연구 성과를 언급하며, 바로 이것들이 우리의 군집 스위치를 이루고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옥시토신은 사람들을 자기 집단에 엮어 주지, 인류 전체에 엮어 주지 않는다. 거울 뉴런은 사람들이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자신과 같은 도덕 매트릭스를 가진 사람에게 특히 잘 공감하도록 한다.
‘우리 인간은 누구든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다.’라고 믿을 수 있다면야 더없이 좋겠지만,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별로 개연성 없는 이야기이다. 그보다는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한 편향적 사랑, 즉 서로에 대한 동질감,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 무임승차자에 억제, 이 세 가지를 통해 강화되는 그 편향적 사랑이,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최대치의 사랑이 아닐까 한다. (435-6)
11장 종교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요약
종교를 초자연적 동인에 대한 일련의 믿음으로 생각할 경우, 백이면 백 종교를 오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종교를 어리석은 망상으로 보게 되고, 심지어 자기들 이익을 위해 우리 뇌를 이용하는 기생충으로까지 여기게 된다. 하지만 뒤르켐주의를 통해(소속감에 초점을 맞추어) 종교를, 다원주의를 통해(다 차원 선택에 뒤따르는 것으로) 도덕성을 바라보게 되면, 이와는 전혀 다른 그림이 얻어진다. 종교라는 것이 수만 년의 세월 동안 우리 조상들을 갖가지 집단으로 엮어왔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식으로 엮이는 과정에는 어느 정도 맹목적 믿음이 뒤따르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사람, 책, 혹은 원칙이 한번 신성한 것으로 선포되고 나면, 헌신적 추종자들은 더 이상 거기에 질문을 던지지도, 그것에 대해 명확하게 사고하지도 못하니까 말이다.
초자연적 동인을 믿는 우리의 능력은 아마도 초고감도 동인 감지 장치의 부산물로서 우연히 생겨났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초창기 인류에게 그런 믿음이 한번 생기고 나서부터는, 그 믿음을 가지고 도덕 공동체를 건설한 집단들이 오래도록 수명을 누리며 번영하는 양상을 띠었다. 19세기 미국에 세워진 종교적 공동 생활촌이 그랬듯이, 초창기 인간들은 신을 이용해 구성원들에게 희생과 헌신을 끌어낼 수 있었다. 또 부정 행위 연구와 신탁 게임에 참가한 이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신은 초창기 인간들이 부정 행위를 억제하고 신뢰를 돈독히 쌓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같은 집단이라도 구성원에게 헌신을 이끌어내고’ 무임승차는 억제할 수 있는 집단만이 더 큰 집단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었다.
인간이 각종 식물과 동물을 처음으로 재배하고 기르게 된 이후, 인간의 문명이 그토록 거침없이 성장할 수 있었던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종교와 바른 마음은 완신세에 들어서기 수만 년 전부터 이미 문화적, 유전적으로 서로 공진화해 오던 상태였는데, 농경이 인류에게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안기면서 그 속도에 한층 불이 붙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같은 집단이라도 신의 힘을 통해 협동이 더 잘 이루어지는 곳, 나아가 개개인의 마음이 이런 신들에게 반응하는 곳, 그런 집단만이 농경의 새로운 도전에 응하여 그것이 가져다 주는 보상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자신을 넘어선 무엇에 관심을 갖는 것, 나아가 다른 이들과 무리지어 그 주위에 몰려드는 것, 이는 다른 것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인간의 비범한 능력이다. 그리고 이렇듯 서로가 한 팀으로 뭉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대업을 추구할 수 있다. 종교의 핵심은 결국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몇 가지 세세한 차이를 제외하면, 정치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 마지막 장에서 우리가 최종적으로 눈을 돌릴 부분이 바로 정치 심리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이 왜 굳이 이쪽저쪽의 정치 팀으로 나뉘어 자기들끼리만 뭉치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밝혀 볼 것이다. 아울러 우리가 특히 중요하게 살펴 볼 것은, 사람들은 어느 한편에 속하게 되면 다른 편의 동기나 도덕성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양한 정치 이데올로기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는 지혜도 함께 말이다. (483-5)
12장 좀 더 건설적으로 싸울 수는 없을까 요약
사람들은 무엇을 자기 이데올로기로 삼을 때 아무것이나 고르지는 않으며, 자기 주변에 있는 사상에 물들어 이데올로기를 갖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이 미리 진보주의자의 성향(운명까지는 아니더라도)을 갖는 것은, 그런 뇌를 가졌기 때문이다. 즉, 모종의 유전자 조합으로 말미암아 그의 뇌는 신기함, 다양성 등에는 특별한 만족을 느끼고 그와 동시에 위험의 신호에는 덜 민감하게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이들의 삶에서 발달하는 특정한 ‘성격적 적응’과 ‘삶의 서사’는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직관적으로 좌파 정치 운동의 장대한 서사(이를테면 진보주의자들의 사회 개선 시나리오)를 연상시키게 되어 있다. 한편 또 다른 유전자 조합으로 말미암아 정반대 구성의 뇌를 갖는 사람은 역시 같은 이유로 인해 보수주의 성향을 미리부터 갖게 되고, 그들의 삶은 우파의 장대한 서사(이를테면 레이건의 서사)를 연상시킨다.
정치의 어느 한쪽에 일단 발을 들이고 나면, 사람들은 그 안의 도덕 매트릭스에 갇혀 거기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한다.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자신이 품은 장대한 서사가 옳다고 확신하며 말했다, 따라서 그 매트릭스 바깥에서 논쟁을 벌여서는 그들이 틀렸다고 이해시키기가 무척 힘들어진다(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12장에서 나는 보수주의자가 진보주의자를 이해하는 것보다는 진보주의자가 보수주의자를 이해하는 일이 더 어려운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진보주의자의 경우 충성심, 권위, 고귀함 기반을 도덕성과 관련시켜 이해하는 것을 다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번 장에서 나는 도대체 자본이라는 것을 도덕 공동체를 지탱시키는 지원이라고 정의했는데, 특히 진보주의자들은 이 도덕적 자본의 존재를 잘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 나는 12장에서 진보와 보수가 음과 양의 관계일 수 있음을 이야기했다. 존 스튜어트 밀의 표현대로, “건강한 정치적 삶에는 이 둘 모두 필요한”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은 배려의 전문가들이다. 기존의 사회 여건 속에서 희생당하는 이들을 진보주의자들은 남들에 비해 잘 알아 보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그러한 여건을 개선시키는 것은 물론 새로운 여건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압박을 넣는다. 진보주의자의 한 사람인 로버트 F. 케네디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세상에는 자기 눈앞의 일들을 바라보며 현실은 왜 이럴까 하고 탄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저는 이제까지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들을 꿈꿉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지요. 왜 그렇게 하면 안 되지?” 12장에서 나는 진보주의자들이 이런 도덕 매트릭스를 가진 덕분에 (내가 보기에) 건강한 사회를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논점 두 가지를 확보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1) 정부는 회사라는 초개체를 제약할 수 있고, 또 제약해야 한다. (2) 실제로 몇몇 중요 문제는 규제를 통해 해결이 가능하다.
20세기 초 이래 진보주의 개혁 운동은 미국과 유럽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쳐왔으나 자유주의자들(자유를 신성시하는 이들)과 사회적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균형추로서의 역할을 막중하게 수행해 왔으니, 나는 12장에서 아울러 설명했다. 자유주의자의 주장에서 옳은 대목은 시장이 기적을 일으킨다는 점이라고 했고(외부 효과 등 시장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이 해결 될 수 있을 때에만), 사회적 보수주의자의 주장에서 옳은 대목은 벌집을 망가뜨려서는 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현재 미국 정치계는 마니교적 분위기가 날로 더해가는 바, 단순히 서약에 서명하거나 나아지겠다고 다짐하는 것으로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우리의 정치가 좀 더 고양을 갖출 수 있으려면, 정치인 선출 절차에 변화를 줄 방법은 물론 정치인들이 상호작용하는 제도와 환경을 변화시킬 방법도 찾아야 할 것이다.
도덕은 사람들을 뭉치게도 하고 눈멀게도 한다. 도덕이 우리를 뭉치게 한다는 것은 결국 각자의 이데올로기를 내걸고 편을 갈라 싸우게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편이 나뉘면 우리는 매 싸움에 이 세상의 운명이라도 걸린 듯이 서로 이를 악물고 싸운다. 도덕이 우리를 눈멀게 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각 편에는 저마다 좋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 이야기 중에는 뭔가 귀담아들을 것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5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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