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준의 공간이 만든 공간

-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을유문화사, 2020)

 

 

 

유한준이 쓴 책은 아이디어가 번뜩이고 표현력이 좋아서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게 된다. 올봄에 나온 『공간이 만든 공간』에서 건축을 통한 문명론을 펼쳤다. 기후에 영향을 받아서 주식으로 서양은 밀을, 동양에서는 벼를 재배하게 되었는데 밀 농사는 혼자서 씨를 뿌리며 개인적으로 농사짓기 좋아서 서양에서는 개인주의가 발달했고 반면 벼농사는 집단으로 해야 해서 동양에서는 집단주의가 발달하게 되어 동서양의 차이가 발생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꼭 그래서 그런 건지 의문도 들기도 하지만 일리는 있는 듯하다.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인해 서양 건축은 석제가 많이 쓰이게 되어 지붕이 무거워서 벽체 중심이 되어 안과 밖의 구분이 뚜렷하게 된 반면에 동양에서는 목제가 많이 쓰이게 되어 지붕이 가벼워 기둥 중심이 되어 경계가 모호해 개방적인 건축이 되었다고 한다. 현대의 서양 건축가들이 서양 건축 양식의 한계를 느끼고 동양의 기둥 중심 건축 양식을 모방해 새로운 건축 양식을 창안해 내고 있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현대의 건축가들 대부분이 컴퓨터를 사용하여 작업하기 때문에 같은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다 보면 자연 비슷한 모양이 나올 수밖에 없어서 갈수록 차별성이 떨어지게 된다는 지적은 기술 진보에 따른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차이에 의해서 나오는 흐름이 창조를 만드는 것이니, 사회의 계급이나 부가 고착화되면 차이에 의한 흐름이 정체되고 사회는 쇠퇴한다. (8)

차이융합에 이어서 새로운 창조를 만드는 요소는 기술이다. 앞서 말한 융합 역시 교통 기술 발전이 만들어 낸 것이다. 교통수단이 발달할수록 문화의 2차적 변종의 탄생은 가속화되고, 여기에 새로운 기술혁명까지 더해지면 문화의 파생과 결합의 방향에 큰 흐름이 생겨난다. 새로운 기술혁명은 분야별로 여러 가지가 있다. 건축에서는 엘리베이터나 철근콘크리트 같은 기술이 새로운 문화적 변종을 만들어 냈다. 스위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독일 건축가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같은 근대 건축의 거장은 이러한 기술을 적극 도입했기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새 시대를 열 수 있었다. (13)

건축물은 그 시대의 지혜와 집단의 의지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결정체로, 그 시대와 그 사회를 대변한다. (25)

동양의 도자기가 서양으로 대량 유입되면서 처음으로 영향을 받은 디자인 분야는 조경이다. 왜냐하면 수입된 도자기 표면에 보통 정원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은 생전 처음 보는 우아한 곡선 지붕의 건축물을 보고 흥미를 느꼈다. 그 충격은 마치 상자 같은 건물만 보면서 자라난 우리가 프랭크 게리의 디즈니 콘서트홀이나 동대문 ‘DDP’ 같은 곡면의 건축물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충격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기존 유럽의 건축은 기하학적이고 직선의 경직된 모습인 반면, 도자기 속에 그려진 정자 건축은 자유로운 곡선의 모습이었다. 건축적으로 서양의 벽 중심의 건축과 달리 도자기 그림 속 건축물은 기둥과 지붕만 있는 정자가 그려져 있었다. 정원의 모습도 유럽의 정원은 직선의 기하학적인 디자인이었다면 도자기 속에 보이는 동양의 정원은 자연 그대로를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의 바위와 나무들의 배치였다. 서양인들은 이전에는 접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정원과 건축물을 보고 동경하고 따라하게 되었다. 영국인들이 정원에 정자처럼 생긴 파고라pergola를 짓고 중국차를 마시는 전통은 이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동양 스타일 따라 하기는 정원에 그치지 않고 문화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어 지금의 한류같은 일종의 중국풍이라고 할 수 있는 시누아즈리라는 현상이 나타났다. (179)

칸은 침묵하는 동양의 보이드 공간을 서양의 기하학적인 틀에 성공적으로 맞춰 넣은 건축가다. 루이스 칸은 20세기 후반 최고의 건축가로 추앙받는다. 그가 그렇게 창조적인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고 융합하는 능력에 있다. 코르뷔지에와 미스가 서양 건축가로서 근대의 새로운 기술에 동양의 문화 유전자를 융합하는 능력을 보여 주었다면, 루이스 칸은 현대식 건축 기술을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서양 전통 건축, 도가 사상, 유대 민족 문화까지 자신이 접할 수 있는 모든 문화적 유전자를 섞어서 융합시킨 건축가였다. 특히 20세기 전반을 거치면서 사라졌던 서양의 전통문화 유전자를 복원하여 사용한 점은 그의 독특한 성취다. 솔로몬의 문양 역시 오랜 과거의 문화 유전자다. 미스나 코르뷔지에가 한 융합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의 문화 유전자를 빌려 쓰는 공간을 뛰어넘는 융합 능력이라면, 루이스 칸은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문화 유전자를 도입하는 시간을 뛰어넘는 융합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간을 초월한 융합 능력이 칸을 위대한 건축가로 만든 것이다. (293~294)

지리적인 발견이 더 이상 불가능한 시대가 되자 인간은 새로운 대륙을 만들었다. 새로운 대륙은 현실 속 공간이 아닌 네트워크 속 가상의 공간이다. (367)

더 좋은 것으로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불완전하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지금이 진화의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하는 순간 창조적 변화는 멈추게 된다. (397)

 

문화인류학적으로 한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은 서로 비슷한 생각과 공감대를 공유하게 되는데, 이와 유사하게 같은 컴퓨터 언어, 즉 같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디자이너들의 생각과 결과물들은 서로 비슷하게 나올 수밖에 없다.

컴퓨터를 이용한 작업의 효율성이 높아진 점은 장점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서 '다양성의 소멸'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다. 과거에는 패션, 건축, 산업 디자인 등 각종 디자인 분야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물건을 만들어 왔다. 패션은 옷감을 가위로 자르고, 바느질했으며, 건축에서는 돌을 쌓고, 나무를 깎고, 콘크리트를 부어서 건축물을 만들어 냈다. 이렇듯 각 분야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제작 방식에 근거해서 서로 전혀 다른, 다양한 결과물을 창조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컴퓨터에서 디자인하고, 스크린상에서 컴퓨터로 만든 3차원 그림을 통해 시뮬레이션하고, 그 형태를 CADCAM(Computer Aided Design, Computer Aided Manufacturinr)을 이용해서 제작하는 비슷한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다. 또한, 매스미디어의 과다한 노출로 인해 서로 점점 더 베껴 가는 과정을 통해 디자인 분야의 '다양성'이 사라져 가는 추세다. 기술에만 의존하는 창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성이 사라진다. 우리는 그런 현상을 20세기 중반 국제주의 양식에서 경험했다. 기술이 이끄는 획일화를 어떠한 방식으로 피하느냐가 이 시대의 중요한 화두다.

기술로 인한 획일화를 피하기 위해 일부 사람들은 사람의 신체에 집중하기도 하고 일부는 재료에 집중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몸과 재료는 현실 세계에서 없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변화하지 않는 것을 찾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인간은 몸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의 유전자에 각인된 짝짓기 본능이나 관음증 같은 가장 원초적인 본능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한 본능은 수십만 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서 진화해 온 것들이기 때문에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건축에서 가장 변화하지 않는 것은 '중력'이라는 법칙이다. 많은 건축이 다양한 디자인을 하지만 태초부터 바뀌지 않는 건축의 본질은 중력과 싸워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현대 건축에서는 구조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형태의 건축물이 디자인되기도 한다. 구조적으로 파격적인 디자인은 본능적으로도 파격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항상 감동을 준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랜드마크 건물은 구조적으로 만들기 어려운 건축물들이 떴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356-7)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것은 무엇인가? 지리적으로 경계를 짓는다면 우랄산맥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우랄산맥 서쪽과 동쪽은 별로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왜 우랄산맥이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인시 의심해 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다움과 인간답지 않음을 나누는 것은 무엇인가? 유기체면 인간이고 무기체면 기계인가? 아니면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인간다움을 나누는 조건인가? 이미 많은 SF영화와 소설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인간다움은 파연 무엇인지 각자가 정의를 내리는 연습이 필요하다.

 

화합시키려는 마음

디지털과 융합해 가는 이 시대에 창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인간다움의 정의를 찾는 것이다. 그 과정 중에 우리가 지난 수백 년간 당연하게 여기면서 살아왔던 방식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기술이 발전하고 새로운 삶의 형태가 나오면 인간의 가치관이 바뀌고 인간다움도 바뀐다. 예를 들어서 현재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수많은 소설과 드라마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둘과 백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1800년대 조선 시대 사람이 지금처럼 자유연애를 하고, 결혼하고, 부모를 모시지 않고 사는 모습을 본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지금은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정략결혼을 백 년 전에는 연애 결혼보다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가치관은 18세기 근대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우리나라도 불과 30년 전만 하더라도 남편이 큰아들이면 부모님을 모시고 살지 않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사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앞으로 30년 후에는 또 다른 가치관을 갖게 될 것이다.
인간은 항상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인간상을 찾아왔다. 이집트 시대의 노예, 중세 시대의 농노, 근대 산업의 노동자, 현대사회의 소비자들은 항상 나름의 가치와 존엄들 찾았다. 다행스럽게도 큰 방향성에서 인간의 존엄은 더 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고 더 커지는 추세다. 하지만 그 과정 중에서 우리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치렀고 수차례의 피의 혁명과 노예와 식민지 시대를 겪기도 했다. 그런 과정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인간다움을 만들 수 있었다. 다음 시대의 인간다움은 이러한 힘든 과정 없이 만들어 내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이다. 디지털과 융합될 시대는 기술이 너무 압도하기 때문에 개인이 사라지고 획일화될 가능성은 더 높다. '과연 인간다움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새로운 생각을 만드는 건보다 더 중요하다. 인간다움이 어디에서 오는지 살펴보려면 모든 것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구별해 내는 눈이 필요하다. 앞으로 사회도 변하고 가치관도 변하고 인간다움도 번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면 우리 자신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짧은 글을 통해 건축가의 관점으로 역사 속 새로운 생각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살펴보았다. 역사 속에서 새로운 생각은 위기와 다름에서 시작했다. 위기와 다름은 보통 갈등과 충돌을 야기한다. 그런데 갈등과 충돌이 있다고 자동적으로 새로운 생각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새로운 생각은 갈등과 충돌을 화합시키려는 마음이 있을 때 만들어진다. 아인슈타인 이전에 물리학계에는 뉴턴의 역학과 맥스웰의 전자기학의 갈등과 모순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위대한 이유는 단순히 물리학의 내재된 모순과 갈등을 찾아내서가 아니다. 그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찾아서다. 아인슈타인은 역학과 전자기학의 모순을 화합시키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합친, 이전에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시공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인간과 기계의 융합,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융합, 실제와 가상의 융합이 절실한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존의 차원을 뛰어넘는 새로운 생각이다. 그리고 그런 새로운 생각을 만드는 창조적 영감은 갈등을 화합으로 이끌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4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