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알랭 드 보통 저, 박중서역, 청미래)
“종교의 모든 원천 중에서도 삶의 최후에 겪는 최고의 위기인 죽음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한 말리노프스키는 인간이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저주를 지니고 있고, 삶을 즐기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와 동시에 “그것이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에 종교에 의지하게 된다고 본다. 종교가 인간에게 불멸의 희망을 주고,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물리쳐 주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수수께끼”를 피할 길이 없으므로, 곧 죽음이 닥쳐올 것이라는 생각에 전반적으로 무기력해지며, 바로 그 때문에 종교나 하느님에게서 위안을 구하게 된다고 말했다. 하이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내세에 대한 욕망이 신앙을 갖게 하는 중요한 이유라고 주장한다. 샬롯 퍼킨스 길먼은 내세에 대한 걱정을 종교의 “기조”라고 말한다. 딘 해머는 종교가 없으면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무력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터 버거의 시적인 말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종교적 힘의 최후의 근원은 죽음 앞에 서 있는 인간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서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인간들의 손에 종교가 쥐어 준 구호의 신뢰성이다(이상 필 주커먼의 『신 없는 사회』, , 김승욱역, 마음산책, 2008) 참조).
위의 인용문에 나타난 종교의 필요성도 사람에 따라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고,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사람의 선택 여부에 따라서 그 영향력이 좌우된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를 선택하게 되는 것은 개인적 취향과 의지에 따른다고 할 수 있지만, 가족이나 사회의 영향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무신론자, 정확히 말하면 비종교적인 사람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 경우 제도화되어 있는 종교적 활동과 개인적 신앙을 구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의 통계는 전자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나온 것일 뿐이라고 여겨진다. 그렇지만 두 가지 모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기성 교회나 성당, 사찰에서 기도를 드리는 거나, 물 한 대접을 구분해 떠다 놓고 무릎 꿇고 기도를 드리는 거나 모두 똑같은 신앙적 자세 또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세속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헌신하는 경우도 거의 신앙적 관심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학자 폴 틸리히는 그런 신앙적 경향들을 통틀어서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엘리아데가 정의한 것처럼 성과 속의 구분이 종교적 신앙의 출발점으로 봐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속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성스러운 것을 구분해 내어 정성을 기울이는 데서 진정한 의미의 종교적 신앙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종교적 신앙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식인 것이기 때문에 각 개인적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그 종교의 세계관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모든 문제를 해석하고 제시하는 해결책을 준행하기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된다. 종교란 믿는 사람에게는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지만 반면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전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종교를 믿고 안 믿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나 선택에 달려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종교를 믿지 않은 무신론자들에게 종교가 주는 장점을, 그냥 무시해 버려두기엔 너무 아까운 가치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이 책은 2011년 알랭 드 보통이 처음으로 방한을 하게 된 기념으로 영어판 출간에 앞서 한국에 먼저 소개된 신작 에세이라고 한다. ‘일상성의 발명가’라 불리는 알랭 드 보통은 그만의 독자적인 스타일로 문학, 철학, 역사 등 다채로운 분야에 걸쳐 일상성의 가치들을 재발견해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종교에 포커스를 맞추어 그의 깊은 통찰력과 위트를 유감없이 발휘해 주고 있다. 㰡무신론자를 위한 종교㰡는 엄격한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현대 무신론의 오류들을 밝히고, 독창적인 관점에서 종교라는 영역을 세밀하게 파헤친 <알랭 드 보통의 종교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알랭 드 보통은 종교에 관한 현대인들의 이분법적인 사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무신론자일지라도 가치 있는 신앙의 측면들을 간과해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종교의 여러 요소들을 검토하는 과정을 통해 종교가 지닌 미덕들과 제도들이 유용하고, 지적이고, 효과적이라는 점을 구체적으로 규명해낸다. 더 나아가서 “신앙의 지혜는 온 인류의 것’이기 때문에 공동체를 회복하는 방법, 친절을 권장하는 방법, 대학교육을 재편하는 방법, 미술관을 재창조하는 방법 등 세속에 파묻혀가고 있는 종교에서 부활시킬 수 있는 교훈들을 선별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알랭 드 보통은 공동체 정신이 무너져 버린 현대 사회에서 “신은 죽었다”고 한 니체의 경귀를 받아들인다. 신에게조차 의지할 수 없게 된 사회에서 소외되어 고립되어 있는 인류는 지금 고독 속에서 방황해야 하는 것이 필연적인 것일까? 드 보통은 현대의 인간과 사회를 향해서 이렇게 주장한다. “종교란 하늘나라에서 인간에게 내려준 것이거나 아니면 완전히 엉터리에 불과한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버릴 때에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그리고 무신론자들을 향해서 기존의 종교가 가진 미덕들과 제도들은 여전히 가치가 있고 유용하고 위안이 되기 때문에, 무신론자들 각자는 자신의 “신전”을 세우고 그 속에서 사랑, 믿음, 관용, 정의, 절제 등의 미덕을 배우고 실천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실천 과정에서 미사, 명상, 문화예술 등 특히 종교 건축, 종교 미술 등의 도움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지혜는 온 인류의 것이 되는 것이다. 드 보통은 단순한 무신론자, 반종교주의자가 아니다. 그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는 소외를 극복하고 사랑과 믿음을 실천함으로써, 공동체 정신과 인간성을 회복시켜 주는 지혜와 희망의 철학이 된다.
세계 곳곳에서 종교 문제가 “십자군 전쟁”, “광기의 지하드”, “근본주의” 등의 제목을 붙인 뉴스와 더불어 첨예한 세계적 이슈가 되고 있다. 몇 년 전에 발생했던 노르웨이의 테러에 대해서도 일부 언론은 “십자군 전쟁” 등의 선정적인 과장된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신을 믿는 사람들의 조직인 종교 집단들은 자신들이 신이 누구인가에 의해서 서로 싸워왔을 뿐만 아니라, 네로, 마르크스, 스탈린, 마오쩌둥 등 반종교주의자들과도 싸워왔다. 이것이 바로 종교의 역사이다. 이와 같이 종교 문제의 핵심을 종교와 종교 사이의, 그리고 종교와 반종교(무신론) 사이의 문제이다. 과학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면서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들은 거짓이며 따라서 종교도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무신론자들은 증명되지 않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종교를 배척해왔다. 알랭 드 보통은 무신론적인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도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다만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관심과 테마를 상실함으로서 세속 사회가 너무 빈곤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기독교, 유대교 그리고 불교 등을 대상으로 독해를 통해 이 책에서 세속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적용되더라도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개념들을 포함하고 있는 종교 생활의 여러 측면들을 검토한다. 또한 종교에서 보다 독단적인 측면을 제거함으로써 현대인이 마주해야 하는 재난과 슬픔에 대한 위안이 되는 측면들을 찾아보려고 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종교는 어떤 특정한 하나의 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알랭 드 보통에게 종교란 인류가 살아오면서 쌓아온 지혜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종교인들의 삶이 여러 가지 문제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공동체가 바탕이 되는 삶의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물질적인 잣대로 서로를 평가하고 그 평가를 바탕으로 상대방을 대하지 않는다. 그 공동체 안에서 그들은 동일한 가치를 가진 존재가 된다. 성찬식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따뜻한 마음의 위안을 받게 된다. 신앙인과 무신론자의 구분을 떠나 종교에는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은 종교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은 본래 인류의 역사에서 형성된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것들을 우리 삶에 받아들여서 현대에 널리 퍼져 있는 소외를 극복하고 사랑과 믿음을 실천하여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 깊은 호소력을 갖게 해준다.
책 속으로
우리의 근본적인 논제는 세속주의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지나치게 세속화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실현할 수 없는 관념을 벗어 던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신앙에서도 가장 유용하고 매력적인 몇 가지 부분조차도 그만 포기해 버리는 불필요한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18) 종교를 믿지 않은 사람이 여러 개의 신앙들에서 이런저런 요소를 차용하는 것이야말로, 예를 들면 문학 애호가가 수많은 고전들 중에서 자기가 특히 좋아하는 작가 몇 명을 골라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코 범죄가 아니다. 이 책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21개 종교 가운데 겨우 3개만을 언급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어떤 편에서나 성마름을 상징하는 것까지는 아니다. 이것은 다만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이 여러 종교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 전반과 세속적인 영역을 비교하는 것임을 보여 주려는 방법에서 나온 결과일 뿐이다. (19) 낯선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은 비교할 수 없으면서도 특이한 혜택을 줄 것이다. 바로 미워하기가 좀 더 쉽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편견과 인종적 다툼은 추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식사를 함으로써 불가피하게 서로 가까이 있게 되면 – 가령 접시를 옆으로 건네주고, 냅킨을 동시에 펼치고, 심지어 낯선 사람에게 소금을 건네 달라고 부탁하는 등의 일을 하다 보면 – 특이한 옷차림에 유별난 억양을 가진 사람은 자기 고향으로 추방되거나 공격을 받아도 마땅하다는 식의 믿음을 우리는 더 이상 고수할 수 없을 것이다. 인종 간의 충돌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제안된 높은 수준의 정치적 해결책도 있지만, 서로를 의심하는 이웃 간의 관용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라면 억지로라도 그들이 식사를 함께 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45) 기독교와 유대교와 불교는 속세에 주류 정치에 나름대로 중요한 기여를 해왔다. 하지만 공동체의 문제에 대해서 이런 종교들이 얼마나 큰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지가 드러나는 때가 있다면, 바로 이런 종교들이 현대의 정치적 각본에서 벗어났을 때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이런 종교들은 100여 명의 지인들과 어떤 홀에 모여서 찬송가를 함께 부르는 행위 속에서, 또는 낯선 사람의 발을 씻어 주는 전례적인 행위 속에서, 또는 이웃과 함께 식탁에 앉아 양고기 스튜를 나눠 먹으며 이야기 하는 행위 속에서 우리가 지녀야 마땅한 가치가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가령 국회와 법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중한 행위와 마찬가지로, 이런 행위들은 지극히 까다롭고도 취약한 우리 사회를 하나로 만들어 주는 데에 도움이 되는 종류의 의식인 것이다. (53-4) 즉 훌륭한 공동체가 되려면, 사실은 그 구성원인 우리 안에 공동체를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 요소가 많다는 점을 수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공동체를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항상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랑의 축제를 연다면, 반드시 바보들의 축제도 열려야 할 것이다. (72) 십계명은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가하는 공격성을 제어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탈무드의 명령이며, 중세 기독교의 미덕과 악덕의 명부를 살펴보라. 거기에 나와 있는 온갖 종류의 학대들은 비록 정도가 다르기는 하더라도, 엄청나게 격한 분노를 일으키기 쉽다는 점에서는 모두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살인과 절도가 악덕이라고 선언하기가 쉬운 편이다. 다만 남을 얕잡아 보는 발언을 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부부간의 성적으로 무관심함으로써 생기는 결과를 경고했다는 것이야말로 도덕적 상상력의 위대한 성취라고 말할 수 있다. (92) 교육의 목표를 옹호한 빅토리아 시대의 또 다른 사람인 존 스튜어트 밀은 이렇게 말했다. “대학의 목적은 유능한 변호사나 의사나 기술자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능력 있고 교양 있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또는 매슈 아널드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적절한 문화 교육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 인간의 혼란을 제거하고 인간의 불행을 감소시키려는 열망”을 우리 안에 고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교육의 가장 야심만만한 목표는 “이 세상을 우리가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훌륭하고 더 행복한 곳으로 만들려는 고귀한 포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112) 현대의 대학과 달리, 종교는 그 가르침을 특정한 시기(청년기의 몇 년간, 특정한 공간(캠퍼스), 단일한 형식(강의)에만 제한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고 느낄 수 있는 피조물임을 자각함으로써, 종교가 우리의 정신을 흔들어 놓기 위해서 자원을 모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종교의 방법 가운데 상당수는 비록 오늘날의 교육 개념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념을 만들어 내는 그 어떤 계획보다도 더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런 기법은 연구하고 이용할 가치가 분명히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남아 있는 시간 동안 과거의 세대보다는 최소한 한두 가지라도 실수를 더 적게 할 수 있을 것이다. (177) 이제부터 우리는 종교의 비관주의가 오직 종교만의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종교가 구원의 희망에 영원히 의존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비록 우리가 아는 세상은 지금 이 세상 하나 밖에 없다는 무신론자의 기본적인 교훈에 의해서 우리의 삶이 영위된다는 하더라도, 우리는 낙원을 믿는 사람들의 명민한 시각을 빌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200) 그 벽은 타인 역시 각자의 어리석음에 관해서 걱정하고, 허비한 이 여름휴가가 얼마나 되는지 계산하고, 이미 10년 전에 떠나간 누군가를 생각하며 눈물 흘리고, 아둔하고 조급하기 때문에 성공의 기회를 날려 버린다는 사실을 다시 확신시키는 증거들이 될 것이다. 이런 현장에서는 아무런 해결책도 제공되지 않고, 고통이 끝나지 않지만, 다만 우리의 고통과 탄식 속에서 어느 누구도 혼자가 아니라는 기본적인, 하지만 무한히 위안이 되는 공개 시인만이 있을 것이다. (208) 이 책에서 제시하는 주장의 핵심은, 현대인이 겪는 여러 가지 문제는 기존 종교가 제시해온 해결책에 의해서 성공적인 대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그 해결책이 처음 고안되었을 때의 초자연적인 맥락으로부터 분리되어야만 한다. 신앙의 지혜는 온 인류의 것이며, 심지어 우리 가운데 가장 합리적인 사람의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것의 가장 큰 적들이라도 이를 선별적으로 나마 다시 흡수해야 할 것이다. 종교는 매우 유용하고, 효과적이고, 지적이기 때문에 신앙인들만의 전유물로 남겨 두기에는 너무 귀중한 것이다. (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