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우에노 치즈코  저 송경원역, 어른의시간)

 

 

 

65세 이상의 인구가 14% 이상이 되면 고령사회, 20% 이상이 되면 초고령사회인데, 한국은 전 세계 국가 중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른 한국 사회에서는 노년의 삶이 기하급수적일 정도로 늘어나고 있으므로 사회문제로서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할 수밖에 없으며, 사회가 함께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대 사회에서 죽음이란 단어는 기피 대상이다시피 되어 가고 있다고 엘리아스는 그의 책, 㰡”죽어가는 자의 고독㰡•에서 지적하고 있다. , 오늘날의 죽음에 관한 태도는 죽어가는 자에게는 고독으로, 살아있는 자에게는 낯섦과 당황스러움으로 크게 나뉜다는 것이다. 또한, 현대인에게서 죽음이란 고독한죽음이며, 죽어가는 자의 곁을 지켰던 사람들조차 사라지면서 죽음은 일상으로부터 격리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병이 나면 곧바로 병원으로 간다. 거기서 치료를 받고 회복해야 퇴원해 살던 사회로 복귀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난치병이라고 분류되면 요양 시설로 옮겨져서 요양하다가 임종이 가까워지면 호스피스 시설로 옮기게 되고 거기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자신의 집에서 건강하게 생활하던 사람들도 나이가 들어 혼자 생활을 하기가 불편해지면 스스로 양로원이나 요양 시설을 찾아가는 것이 일반적으로 되어 가고 있다. 집안에서 살아가다가 임종이 임박한 징후가 보이면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 의해 거의 자동적으로 신속하게 병원으로 옮겨져서 자기 집에서 임종을 맞는 것이 아주 드문 경우가 되어 가고 있다.

오히려 자기 집에서 지켜봐 주는 사람이 없이 혼자서 임종을 맞고 뒤늦게 발견되는 경우 고독사라고 뉴스에 나오고 불쌍한 죽음이라고 동정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현대에서는 죽음은 사회에서 격리된 것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과거 전통 사회에서는 특히 우리의 경우 주어진 수명을 다 누리고 평안한 죽음을 맞는 것을 오복 중에 하나로 꼽았다. 노후에 자손들에게 극진한 보살핌을 받다가 자손들에게 둘러싸여 임종을 맞는 것을 진정한 오복으로 부러움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죽음에 대한 책들이 나와서 한번 읽어 봐야겠다고 하면서도 꺼림칙해서인지 나도 모르게 기피 대상으로 미루고 있었던 것 같다. 이번 학기 과제 관련 목록에서 이 책, 우에노 치즈코의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에 관심이 가서 사서 읽게 되었다.

단독 가구가 급속도로 늘어나는 추세일 뿐만 아니라 평생 함께 살아오던 부부도 뒤늦은 이혼이나 사별하게 되면 자연 혼자서 죽음을 맞게 되게 되는 만큼 그야말로 <누구나 혼자인 시대>를 살아가면서 죽음을 맞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바로 내 현실을 놓고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았다.

책을 읽다가 고정관념이 완전히 뒤집히는 즐거움 때문에 끝까지 읽는 고역을 감수하게 되는데, 고독사는 절대 피하고 싶은 죽음의 형태로 여겼었지만, 이 책을 읽다 보니, 그것도 썩 괜찮은 것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살아있는 동안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지키자는 말이다! 그리고 고독사역시, 그것이 불가피한 환경이라면, 무조건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살아있는 동안 잘 준비해서 가장 편안하고 아름답게 떠나자는 것이다. ‘자발적 고독사는 일종의 존엄사이고, 나아가 존엄생이지 않으냐고 저자도 말하고 있다.

자신을 싱글이라고 소개하는 일본의 독신 여성 사회학자 우에노 치스코가 관찰하고 연구해 온 죽음을 맞는 방식에 대한 리포트다. 페미니스트로 유명하지만, 간병(돌봄) 문제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낯선 병원이나 시설에서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익숙한 환경인 자신의 집에서 죽음을 맞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집에서 홀로 죽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궁금증에서 시작한 그동안의 연구 결과들을 모아 이 책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러려면 간병을 할 수 있는 가족이 있어야 하는데, 누구나 혼자인 시대에서는 가족에게 의존할 수 없으므로 대신할 사회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구체적인 방안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에서는 싱글의 죽음을 돕기 위한 여러 시스템이 오래전부터 구축해 왔다. 방문간호스테이션, 야간방문 진료 등을 하는 단체들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병원 전문의는 전쟁터와 같은 수술실을 박차고 나와서 작은 마을의 개업의로 살아가며 왕진을 돈다. 이러한 시스템이 제대로 자리 잡으면 독신자, 나아가 치매에 걸린 환자도 병원으로 실려 가야만 하는 신세를 면할 수 있게 된다. 병원은 환자에게 비일상적인 공간이다.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일상에서 분리되어 낯선 공간으로 옮겨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병원에서는 그저 환자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결국 종착역인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되고 만다.

이 책에 곱씹어 볼 대목들이 많다

 

죽기 이틀 전 익숙한 환경을 떠나 미지의 공간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다니. 인간의 생활은 오늘처럼 내일이 이어지는 관성의 선물이다. 그것을 순식간에 바꾸려면 큰 결심이 필요할 것이다. 집에서 홀로 죽음을 맞는 것에 대해 취재해 온 내게 여러 관계자가 입을 모은 '집에서 홀로 맞는 죽음'의 조건은 본인의 확고한 의사였다. 이때의 확고한 의사란 집에 혼자 두려 하지 않는 가족, 병원이나 호스피스를 권하는 주위 사람에게 굽히지 않는 것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누구든 죽음을 앞두면 주위 사람에게 다정해지고 마음이 약해진다니, 주위에서 억지로 권한다면 게다가 가족의 부탁이라면 가족을 위해서라도 입원을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은 유지하는 것보다 그것을 순식간에 변경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시바다 씨를 보면서 집에서 홀로 죽는 데에는 '확고한 의사는 필요 없다. 그저 하루하루 우물쭈물 조심조심 지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시바다 씨가 내게 남긴 유산이다.” (163)

'사회 자본' 중 가장 강력한 지원은 예나 지금이나 가족이다. 하물며 가족에게 의존할 수 없는 싱글에게는 가족을 대신할 네트워크가 반드시 필요하다. 없다면 노력해서 만들어야 한다. 어떤 인간관계든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여자 친구들>(2012)의 저자 기무라 사카에 씨가 알려 주었다. 기무라 씨도 긴 암투병 생활을 친구들의 지원으로 버티다 2014년 세상을 떠났다. 유고집 <병은 길동무>가 그 해에 나왔다.

이 유고집 후기에 기무라 씨의 투병 생활을 마지막까지 도운 서포트 네트워크 중 한 명인 노무라 가네코 씨는 이렇게 썼다.

"기무라 씨는 제멋대로인 환자였습니다."

이렇게 투덜거리면서도 기무라 씨에게 많은 것을 받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돌봐 준 사람이 돌봄을 받은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한다...... 우정이란 참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계약이나 이해득실과 관계가 없는 인간관계만큼 만들기도 힘든 유지하기도 어려운 관계도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소식이 끊겨도 불평할 수 없고 왜 멀어지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하다.

나는 늘 '돈 부자보다 사람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노래 부르듯 강조해 왔다. 이에 대해 칼럼니스트 후키사와 씨는 .... 친구를 만들기가 연인을 만드는 것보다 가족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고 말한다. 지당한 말씀이다. 친구에게는 연애나 가족처럼 정형화된 역할이 없다. 서로 이해에 얽힌 게 없는 만큼 장점도 결점도 포함해 상대의 모든 것을 받아 들여 대등한 관계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책에서 멋진 조언을 한다.

"그 사람과 요즘 소원해졌다거나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친구인데 어쩌면 이럴 수가 하고 화를 내기보다는 마음속에서 그 사람을 친구에서 지인으로 카테고리를 살짝 변경하면 됩니다." (202-3)

결국 한 사람의 살아가는 방식과 개성이 삶의 마지막 시기에도, 아니 마지막 시기이기에 더욱 드러난다. (205)

집에서 홀로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돕는 무사시노 시의 '너스스테이션 탄포포'의 방문 간호사 단나이 마유미 씨는 가정 임종의 조건은 '본인의 확고한 의사' 이상으로 본인의 '자기해방'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해방이란 때가 오면 자신을 남에게 내주고 남의 손에 맡기는 힘을 말한단다. 이런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돌보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는 얘기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뜻대로 하고 싶다, 남에게 신세 지고 싶지 않다고 고집스럽게 '자립'을 바라기 보단 무력한 자신을 받아들여 주는 타인에게 맡기는 일도 하나의 능력이다. 이것을 '해방'이라 표현해낸 건 그 때까지 살아온 방식에 대한 고집이나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죽을 때는 누구나 한없이 무력해지기 마련이다. 자기해방은 자기의 무력함을 받아들이는 지혜이다.

자기해방과 본인의 확고한 의사는 서로 반대되는 말이 아니다. 장애인들은 불편한 몸을 남에게 맡기는 경험과 훈련을 오랫동안 해왔다. 남에게 자신을 어떻게 맡길 것인가도 자신의 의사, 맡긴 뒤에 어떻게 해주길 원하는가도 자신과 상대의 교섭 과정이다. 케어란 어디까지나 상호 행위이다. 장애인에 비해 노인은 돌봄을 받는 데에 초심자다. 뜻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됐을 때 언제 어디에 누구에게 어떻게 맡길지를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도 싱글의 과제 중 하나이다. (234-5)

여행도 비일상이므로, 기분 전환이 될지 몰라도 편안한 휴식은 되진 않는다. 집은 세상에서 가장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유일한 거처이며, 그런 장소를 확보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이것이 내가 따로 살기를 권하는 이유다.따로 산다고 해서 부모를 버렸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부모님 집을 오가면서 돌보면 된다. 최근에는 가족 간병도 같이 사는 가족이 아니라 따로 사는 가족이 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통근 간병도 드문 일이 아니게 되었다. 나는 24시간 붙어서 간병하는 가족을 '풀 타임 가족', 하루에 몇 시간만 함께 하는 가족을 '파트 타임 가족'이라고 부른다. (251)

삶이라는 건 서로에게 폐를 끼치는 일의 연속이다. 부모 자식 간에는 무한정 폐를 끼쳐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서로에게 의존하는 대신 타인끼리 약간의 폐를 서로 잘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두는 편이 좋다. (259)

장애인의 부모는 나중에 성인이 된 자식에게 간병을 받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지적 장애인, 신체장애인, 정신 장애인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죽은 뒤의 자식 걱정으로 '이 아이를 두고 죽지 못한다'는 정신적인 압박 때문에 궁지에 몰리기도 한다. (261)

부모가 혼자 살아도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는 것이 자식의 안심으로 이어진다. 또한 자신이 죽은 뒤에도 자식이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곧 부모의 안심으로 이어진다. 이미 몇 번이나 말했지만 부모가 먼저 죽는 게 일반적인 순서다..... 저는 부모님이 안 계셔도 잘 지낼 수 있어요. 이런 말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복지가 있는 게 아닐까? (263)

일본은 혼자 사는 ALS 환자가 24시간 타인의 간병을 받으며 생활하는 세계적 모델이 되는 지역이다.... 이것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절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ALS 환자들이 "사람 사는 세상의 정의를 믿고", "미래와 계약을 맞는다는 각오로 되든 안 되든 하늘을 향해 발을 내디딘" 결과이며 거기에 다리를 놓은 이들은 비로 환자를 지원하는 여성들이었다. (276)

튜브 영양을 할지 멀지, 인공호흡기를 달지 말지 어느 한 쪽에 편들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때그때 망설이고 휘둘리는 것이 가족의 역할이다. 만약 그런 가족이 없다면 주위 사람들이 본인과 함께 망설이고 고민하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살고 죽는 때에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태어날 때나 태어나는 방식도 선택할 수 없다.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선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283)

태어나고 죽는 일은 자신의 의지를 뛰어 넘는다. 그것을 컨트롤 하려는 마음은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손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의 일은 노력하면 바꿀 수 있다. 주어진 삶을 끝까지 살아내는 것, 그리고 나를 비롯해 가족이 있는 사람도 가족이 없는 사람도 많은 사람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종교가가 아닌 사회학자로서 저 세상을 구원으로 여길 게 아니라 이 세상의 일은 이 세상에서 해결하고 싶다는 것이 내가 품고 있는 실천적 의지이다. (301)

애초에 카리스마 리더를 요구하는 시대는 변변찮은 시대다. 사회에 결함과 문제가 있기 때문에 초인적인 능력을 갖춘 리더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특히 정치적 카리스마가 필요에 의해 등장하는 시대가 제대로 된 것일 리가 없다. 초인적인 힘에 기대지 않고도 잘 돌아가는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이다. 슈퍼맨 같은 힘이 없어도 보통 사람이 보통 방식으로 자신의 전문성을 충분히 발휘하고, 이런 개개인이 모여 혼자라면 불가능한 과제를 달성할 수 있다. 이것이 '다직종연계'라는 이름의 시스템을 만드는 의미이다. (305)

저자는 태어나고 죽는 것은 의지를 뛰어넘는 것이지만 살아있는 동안의 일은 노력하면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존엄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주어진 삶을 끝까지 살아내는 것, 그리고 자신을 비롯해 가족이 있는 사람도 가족이 없는 사람도, 많은 사람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저세상을 구원으로 여길 게 아니라 이 세상의 일은 이 세상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에 담긴 저자의 실천적 의지이다.

초고령사회가 앞서 시작된 일본의 선례이기도 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기도 한데 일본도 저 정도인데 우리나라가 과연 이 정도까지라도 소화해낼 수 있을까 걱정만 더 늘게 되었다.

일본의 예처럼 시스템을 잘 만들어 갈 수 있다면 삶의 마지막 시기도 공연히 두려워할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사람 부자라는 말로 대표되는 연계, 전통적인 가족을 대신할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 마음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