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읽기 아까운 글들 (3)

 

 

 

 

김태길의 「글을 쓴다는 것

 

글이란 체험과 사색의 기록이야 한다. 그리고 체험과 사색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글이 읽을 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체험하고 사색할 시간의 여유를 가지도록 하라. 암탉의 배를 가르고, 생기다 만 알을 꺼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한동안 붓두껍을 덮어 두는 것이 때로는 필요하다. 하고 싶은 말이 안으로부터 넘쳐 흐를 때, 그때에 비로소 붓을 들어야 한다.

일단 붓을 들면 심혈을 기울여 써야 할 것이다 거짓 없이 성실하게, 그리고 사실에 어긋남이 없도록 써야 한다. 잔재주를 부려서는 안 될 것이고, 조금 아는 것을 많이 아는 것처럼 속여서도 안 될 것이며, 일부의 사실을 전체의 사실처럼 과장해서도 안 될 것이다.

글이 가장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지는 예는, 인기를 노리고 붓대를 놀리는 경우에서 흔히 발견된다. 자극을 갈망하는 독자나 신기한 것을 환영하는 독자의 심리에 영합하는 것은 하나의 타락임을 지나서 이미 죄악이다.

글 쓰는 이가 저지르기 쉬운 또 하나의 잘못은, 현학의 허세로써 자신을 과시하는 일이다 현학적 표현은 사상의 유치함을 입증할 뿐 아니라, 사람됨의 허영스러움을 증명하는 것이다. 글은 반드시 여러 사람의 칭찬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되도록 여러 사람이 읽고 알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어야 하며, 진실의 표명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필요한 것은 나의 자아를 안으로 깊고 크게 성장시키는 일이다.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대서서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 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온 목조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에 틀림없다. 기둥 높이의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 갖춘 필요미이며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도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량수전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지체야말로 석굴암 건축이나 불국사 돌계단의 구조와 함께 우리 건축이 지닌 참멋, 즉 조상들의 안목과 그 미덕이 어떠하다는 실증을 보여주는 본보기라 할 수밖에 없다.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어진다.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줄 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 빙빙 도는 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이다.

이 무량수전 앞에서부터 당간지주가 서있는 절 밖, 그 넓은 터전을 여러 층단으로 닦으면서 그 마무리로 쌓아 놓은 긴 석축들이 각기 다른 각도에서 이뤄진 것은 아마도 먼 안산이 지니는 겹겹한 능선의 각도와 조화시키기 위해 풍수사상에서 계산된 계획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석축들의 짜임새를 바라보고 있으면 신라나 고려 사람들이 지녔던 자연과 건축들의 조화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같고, 그것은 순리의 아름다움이라고 이름 짓고 싶다.

크고 작은 자연석을 섞어서 높고 긴 석축을 쌓아 올리는 일은 자칫 잔재주에 기울기 마련이지만, 이 부석사 석축들을 돌아보고 있으면 이끼 낀 크고 직은 돌들의 모습이 모두 그 석축 속에서 편안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희한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장영희의 [아프게 짝사랑하라]

 

그런데도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것은 책을 읽는다는 것이 바로 짝사랑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책들 중 하나를 선택하고서 그를 이해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바쳐도 그야말로 “대답 없는 벽”처럼 외면하는 데도 포기하지 못하고 더욱더 정성을 바치게 되는 것이 진짜 짝사랑이리라. 책이든 사람이든 그렇게 열심히 짝사랑하다 보면 참된 사랑을 얻을 수 있겠지!

어느덧 불혹의 나이를 넘긴 나, 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롭게 삶에 대한 포용력을 가지고 조금은 호기를 부릴 수도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렇지만 ‘不惑(불혹)'-보고 듣는 것에 유혹받지 아니하고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함-이란 말은, 따지고 보면 슬픈 말이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격하지 않고, 슬픈 것을 보고 눈물 흘리지 않고, 불의를 보고도 노하지 않으며, 귀중한 것을 보고도 탐내지 않는 삶은 허망한 것이리라.

그것은 즉 이제는 치열한 삶의 무대에서 내려와 그저 삶을 관조하는 구경꾼으로 자리바꿈했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니, 어쩌면 '불혹'이란 일종의 두려움, 삶의 한가운데로 다시 뛰어들 용기가 없는 데에 대한 슬픈 자기 방어를 말하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짝사랑이란 삶에 대한 강렬한 참여의 한 형태이다. 충만한 삶에는 뚜렷한 참여의식이 필요하고, 거기에는 환희뿐만 아니라 고통역시수반하게 마련이다. 우리 삶에 있어서의 다른 모든 일들처럼 사랑도 연습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짝사랑이야말로 성숙의 첩경이고 사랑 연습의 으뜸이다. 학문의 길도 어쩌면 외롭고 고달픈 짝사랑의 길이다. 안타깝게 두드리며 파헤쳐도 대답 없는 벽 앞에서 끝없는 좌절감을 느끼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는 자만이 마침내 그 벽을 허물고 좀더 넓은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승리자가 된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여, 당당하고 열정적으로 짝사랑하라. 사람을 사랑하고, 신을 사랑하고, 학문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고, 저 푸른 나무 저 높은 하늘을 사랑하고, 그대들이 몸담고 있는 일상을 열렬히 사랑하라. 사랑에 익숙지 않은 옹색한 마음이나 사랑에 '통달'한 게으른 마음들을 마음껏 비웃고동정하며 열심히 사랑하라. 눈앞에 보이는 보상에 연연하여, 남의 눈에 들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사랑의 거지가 되지 말라. 창밖의 젊은이들을 보며 나도 다시 한 번 다짐한다. '불혹'의 편안함보다는 여전히 짝사랑의 고뇌를 택하리라고. 내가 매일 대하는 저 아름다운 청춘들을 한껏 질투하며 나의 삶을, 나의 학문을, 나의 학생들을 더욱더 열심히 혼신을 다해 짝사랑하리라.

언젠가 먼 훗날 나의 삶이 사그라질 때 짝사랑에 대해 허망함을 느끼게 된다면 미국 소설가 잭 런던과 같이 말하리라. "먼지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재가 되겠다"고. 그 말에는 무덤덤하고 의미 없는 삶을 사는 것보다는 고통을 수반하더라도 찬란한 섬광 속에서 사랑의 불꽃을 한껏 태우는 삶이 더 나으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