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도정일, 최재천 휴머니스트 , 2005)

 

 

 

영문학자 도정일교수와 동물학자 최재천교수가 벌인 『대담』은 몇 년에 걸친 인문학자과 자연과학자의 불꽃 튀기는 지식의 향연을 기록한 책이이다.

영혼도 복제가 가능할까라는 논의가 특히 흥미진진하다. 모든 유전 정보를 DNA 속에 담고 있기에 영혼이 있다면 그것의 물리적 기반이 될 것이라고 한다. 나의 복제 인간을 만든다면 나와 똑같은 쌍둥이가 몇 십 년 늦게 생기는 것이 되겠지만 자라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이 될 거라고 전망한다.

나의 복제 인간을 만들어서 장애가 없이 사는 나를 보고 싶었었는데 그러면 전혀 다른 인생을 살 거란 얘기다. 좋은 머리를 타고 났을 태니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을 갖게 되어서 화려한 이력서를 지니게 되었을까? 그런데 내가 읽은 책들 가운데 얼마나 같은 걸 읽을지 궁금하다. 또 키는 얼마나 컸을 것이며, 어떤 여자와 결혼했을까? 그래서 지금의 나에 비해 얼마나 행복한지 비교할 수 있을까.....?

어머니가 내 몸이 말을 안 들어서 답답해 흉을 보시다가 최고의 위로로 삼아 하신다는 말씀이 (난 별로이지만) 우리 집안을 구원하시려고 희생양으로 보내 주신 것이라는데 그렇다면 나와 같은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런 상상을 하게 해준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두터운 세계. 그것이 그(도정일)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언급하면서, 미국이 세계를 너무 얇고 투명하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다른 것, 심지어 대립-모순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공존할 수 있도록 세계를 넉넉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것은 우리가 다시 한 번 던진 물음, 즉 인문학적 소양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답변이기도 했다.

두터운 세계를 위한 윤리학, 그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타인을 이해한다, 타자를 이해한다. 우리말로 치면 역지사지, 바꿔서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건데, 기본적으로 타자를 긍정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죠."

"인문학적 삶의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내가 첫 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이 '가슴을 여는 사회'입니다. 자기만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울타리를 걷어치울 줄도 알아야 하죠. 그래야 타자가 들어오거나 자기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아니에요?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인문학적 삶의 제1조예요." - 본문 30

2. 그렇다고 그(최재천)가 스스로를 대단한 운동가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물론 숲이 망가지고 있는데 무슨 논문이냐며 숲을 먼저 살리자고 운동에 뛰어든 생태학자들을 존경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것을 자기 몫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귀한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 쓰면서도 자신은 그저 소박한 존재일 뿐이란다.

"저는 환경운동을 하시는 분들에게도 생태학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해요. 잘 알지 못하면 보호한다는 것이 오히려 파괴하는 것이 되죠. 알아야 제대로 사랑을 할 수도 있는 겁니다. 자연에 대해 점점 더 알게 되면 저절로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함께 살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젊은 친구들을 20년 정도만 열심히 가르치면 그들이 우리 사회의 주인이 되었을 때 환경은 저절로 보호될 겁니다. 지나치게 이상적인 생각이라고 탓할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엔 그게 그래도 빠르고 현실적일 것 같아요." - 본문 56

최재천 저는 솔직히 황우석 선생 같은 양반이 없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우리가 아예 복제과학이란 것을 생각조차 못했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수도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거죠. 과학기술의 발달이 꼭 지금과 같은 형태로 이루어졌어야 할 필요는 절대로 없습니다. 하지만 과학이 뭐 별겁니까?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지만 호기심이 가장 많은 동물은 단연 우리 인간이죠. 저는 과학이란 우리 인간의 알고자 하는 욕망과 행동을 체계적으로 구성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앎의 행동'은 우리의 본능이죠. 저는 심지어 기독교도 과학을 부추겼다고 생각합니다. 왜 현대 과학이 동양이 아니라 서양에서 꽃을 피웠느냐 하는 문제에 의견들이 분분한데, 저도 하나 보태렵니다. 하느님은 왜 하필이면 우리에게 '지식의 나무'를 일부러 골라내어 그건 절대로 먹지 말라고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을까요? 저는 하느님이 당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 인간에게 과학을 허락하신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멈출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는 방법이 문제일 뿐이죠.

도정일 바로 거기에 중요한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기술과 과학은 상당한 맹목성을 가지고 있죠. 방법의 맹목성이요. 할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하자는 겁니다. 하지만 인문학은 그 방법이란 게 '무엇을 위한' 방법인가를 따집니다. 목적의 정당성 여부를 질문하는 거죠.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최선의 효과적 방법이 기술이라는 건데, 이때 방법만 생각하고 목적의 정당성은 따지지 않는 것이 기술의 맹목성입니다 자, 여기 유대인 100만 명이 있다, 이들을 가장 빨리, 가장 효과적으로 죽여 없애는 방법이 뭐냐? 이것이 히틀러의 주문이었어요. 기술자들이 생각해낸 '최선의 방법'이 가스실 처형이었습니다. 방법이 있더라도 목적 자체가 정당하지 않으면 그 방법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인문학적 사고입니다. 흔한 지적이지만 '어떻게?'를 생각하는 사고와 ''라고 질문하는 사고의 차이가 거기에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생명과학의 기술적 부가 가치, 시장 규모, 기술 선진성, 미래 산업, 다음 대박 같은 것이 지배적 관심사입니다.

최재천 저는 명색이 생명과학자지만 사실 복제 연구 같은 걸 직접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전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동식물들의 행동과 생태를 연구하는 사람이죠. 그렇지만 사뭇 '위험한' 연구를 하고 있는 동료 연구자들의 입장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의 동정에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저는 제대로 된 과학자라면 모름지기 자신이 하고 있는 연구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최소한의 인문학적 분석을 할 줄 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는 종종 우리 과학자들을 너무 지나치게 단순한사람들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도 고민합니다. 우리도 인류에게 좋은 공헌을 하고 싶어 합니다. 저는 언제나 자유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구속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이 날 구속하기 전에 내가 스스로 나를 구속하고 그걸 남이 인정하면 가장 이상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우리 과학자들이 충분한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람들이 생명과학에 걸고 있는 기대는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여기에도 큰 맹목성이 있죠. 사람들이 은근히 가장 원하는 것은 불별이에요. 생명과학이 발달해서 어느 순간에 우리를 죽지 않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기대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우리가 죽지 않는 방법을 발견하면, 그게 모두가 죽는 순간입니다. 생명체가가지고 있는 이 엄청난 번식력 속에서 지구라는 요만한 땅덩어리가 살아남는 게 신기한 일이에요....

하지만 생태학자 로버트 백아더의 계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20분에 한 번씩 둘로 분열되는 박테리아에게 먹이를 무한정 공급하고 일단 태어난 박테리아는 죽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불과 하루하고 반나절만 지나면 현미경으로 들여다 봐야 겨우 보일 정도의 작은 박테리아의 살이 지구의 표면을 우리 정강이 반 이상을 덮을 만큼 늘어난다는 겁니다. 그 후 한 시간이면 확실하게 우리키를 덮을 것이고, 몇 천 년 후면 그 박테리아 살의 무게가 우주의 무게와 맞먹을 것이며 그 부피는 저 우주를 향해 빛의 속도로 팽창할 것이랍니다. 생물의 번식력은 이처럼 어마어마한 겁니다. 누군가가 죽어 주기 때문에 내가 살 수 있는 거죠. 죽음이 삶을 허락하는 겁니다. 그러니 모두가 죽지 않게 되는 날이 모두가 함께 죽기 시작하는 날이 되는 겁니다.(174~177)

도정일 대학의 학부 영문학강의는 인문학 교육의 일부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인간은 어째서 인간인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이 인문학의 핵심 질문이죠. 영문학이든 국문학이든, 학부의 문학 강의는 그 질문을 늘 바탕에 깔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질문이 두어 개 더 있습니다. 하나는 문학을 만나고 경험하는 것이 사람을 형성하는, 말하자면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데 무슨 중요성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고, 또 하나는 영문학 교육이란 것이 서구 문명과 문화, 그리고 현대 세계를 이해하는 데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영문학은 서양학의 일종이니까 이런 문제를 때 놓을 수 없습니다.(195)

도정일 ... 중요한 건 신이 지식의 나무에만 접근을 금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나무에도 금지령을 내려놓았다는 겁니다. 신은 애당초 인간에게 영생을 줄 의사가 없었거나 "영생을 줄 건지 말 건지는 이 녀석들이 아비 말을 잘 듣고 복종하는가 어떤가를 봐서"라는 식으로 결정을 미루어 놓았던 건지 모릅니다. 그런데 야훼는 전지(全知)의 신입니다. 전지의 신이라면 아담과 이브가 결국은 아비 명령을 어기게 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냥 내버려두었다고 해야 논리적으로는 맞습니다. "신은 미래를 아는가?"라는 문제는 물론 지금도 신학의 논쟁거리입니다 인간의 단순한 머리로 생각하면 미래라는 것은 아직 오지 않은 것, 일어나지 않은 사건입니다. 말하자면 존재하는 게 아니죠. 그래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에 대해서는 신도 모른다는 주장이 나와요. 그러나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분할은 인간의 의식 속에만 있는 인간의 시간입니다. 시간을 넘어선 것이 신이라면 그 신에게 그런 시간 구획이 있겠습니까?

…….

도정일 그렇더라도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문제가 많아요. 신에게 시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시다. 그 신은 시간의 세계를 만들고 인간을 그 세계 속에 던져 넣습니다. 여기서 무시간성과 시간성의 관계가 문제입니다. 시간 존재 아닌 신이 시간의 세계를 만들었다면, 그는 그 세계의 바깥에 , 거기서 완전히 분리된 곳에 있으면서 시간의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간을 오불관언으로 구경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하지만 히브리-기독교의 신은 자비와 사랑의 신으로 나옵니다. 인간을 만들고 보살피고 사랑하는 신이죠. 시간 존재 아닌 신이 시간 세계의 인간을 보살핀다면 그건 그가 불완전한 시간의 세계에 관심을 갖고 그 세계를 사랑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시간 존재 아닌 신이 시간을 사랑한다? 완전성의 신이 불완전한 세계를 사랑한다? 이건 논리적 모순이죠. 무시간 존재는 시간을 그리워할 필요가 없고 완전한 것은 불완전한 것을 사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히브리-기독교의 신은 시간을 넘어선 존재이면서 동시에 시간 속에 있는 존재 같아 보입니다. "신은무시간적 존재다"라는 진술과 "신은 시간적 존재다"라는 진술은 서로를 배척합니다. 두 진술이 동시에 맞을 수는 없죠. 하지만 히브리의 신에게는 그 두 모순 진술이 다 맞아야 합니다. 하긴, 이 모순을 껴안아야 하는 것이 어쩌면 신의 고통이고 그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인간을 사랑하기로 한 것이 그의 위대한 능력일지는 모르죠. 어느 경우든 히브리 경전의 신은 인간을 시험에 걸어 놓"요 녀석, 어느 쪽을 선택하는지 보자"며 범불 뒤에 숨어서 인간의 노는 꼴을 지켜보는 데 특별한 취미를 가진 존재 같습니다. 족장 아브라함도 그런 시험에 걸리죠.

선악을 아는 분별지(分別知)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선악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선을 전택합니까? 악을 구별하지 못한다면 무한 지식의 추구가 악의 일종이라는 걸 어떻게 알죠? 아담 부부가 분별의 지식을 갖고 있었다면 금단의 열매를 먹지 않았을 거라는 역설도 성립합니다. 게다가 인간의 조상이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었는데도 그 후의 인간들은 더 지혜로워지지 않았고 무한지식을 갖게 된 것도 아닙니다.(216~7)

도정일 최 교수님께서 "영혼은 DNA'라고 말했는데 대담한 선언입니다. 그런데 최 교수님께서 인정하듯 영혼이 DNA라면 영혼도 당연히 유전되어야 하는데 그게 그렇지 않아 보인다는 게 문제입니다. 제가 앞서 영혼과 혼을 구분한 것은 그래서예요. 우리가 혼이라 부르는 것은 문화적으로 전승되지만, 개인의 영혼일 때는 문제가 달라져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게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도 인정해야죠. 신의 경우처럼, 영혼이란 과학적 존재 입증의 대상이 아니라 종교적 믿음의 범주입니다. 입증되지 않으므로 적어도 과학적으로는 것의 유전 여부를 확언할 수 있죠. 그래서 영혼 문제에 관해서는 이런 수정안을 내놓고 싶습니다. 수정안이라? 우리가 무슨 남북협상을 하는 것도 아닌데 웬 수정안? 하지만 생물학자와 인문학도가 만나 이런 대화를 할 때의 소득이 워겠습니까? 생물학적 입장과 인문학적 견해 사이의 가능한 접점을 찾아내자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야 서로 얻는 것이 있고 문제 접근의 길이 열릴 테니까요.

영혼은 복제되지 않고 유전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혼이란 것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고 그 존재를 믿고 싶어 하는 성향(disposition) 자체는 인간의 DNA에 들어 있다. 생물학적으로 복제되고 유전되는 것은 이 성향이라는 게 제 수정안입니다. 앞서 저는 '영원성에 대한 갈망의 산물이 영혼'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DNA 베이스를 갖는 것은 '영원성에 대한 갈망이죠. 인간의 DNA 속에 들어 있는 것은 갈망이지 영혼 자체는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 시간성으로부터의 자유가 영원성입니다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것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가 '시간성으로부터의 자유'예요. 인간은 시간의 노예죠. 아무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고 반역을 시도할 수 없어요. 그러나 그 노예 상테를 거부하고 시간의 제왕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영혼입니다. 우리가 영혼이라는 것에 갖다 붙이는 가장 중요한 특성이 자유라는 거죠. 이 자유 속에는 시간성으로부터의 자유를 비롯해서 온갖 자유가 다 포함됩니다. 그래서 다시 정리하면 인간에게는 자유 추구의 성향이 DNA속에 들어 있고, 이것이 영혼이란 것의 생물학적 토대라는 게 됩니다.(276~7)

최재천 제 영혼과 제 할아버지의 영혼을 다 꺼내 놓고 비교해 볼 때 좀 비슷했으면 좋겠어요. 만약 전혀 다르다면 좀 섭섭할 것 같아요. 만약 영혼이 유전된다면 할아버지, 아버지의 혼과 비슷한 것이 제게 존재할 것이고,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상상해봅니다. 이때 영혼도 유전될 가능성이 있다면, 결국 그 영혼의 근본은 DNA를 타고 건너오는 것일 데니까, 할아버지의 DNA가 아버지를 거쳐 제게 왔는데 그게 환경과 결합하여 변하고 적응하고 한다면, 분명 죽을 때 영혼은 태어났을 때와 상당히 달라져야죠. 그런 면에서 , '만질 수 있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변화한다'는 측면에서,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영혼도 결국 물질을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겁니다.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영혼도 DNA의 산물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도정일 DNA는 생물학적으로 유전되지만 영혼은 그런 식으로, 그러니까 생물학적으로는 유전된다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영혼이란 것이 있어서 물질적으로 유전된다면 독립투사 집안에서는 대대로 투사나 지사가 나와야죠. 그러나 할아버지는 독립군, 아들은 일제 만주군, 손자는 왕사기 꾼 하는 식으로 엇갈리는 수가 좀 많습니까. 박완서 선생의 자전소설 㰡”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㰡•'구렁재 호랑이 할멈'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전쟁 때 어느 쪽 군대가 오든 이 할머니는 걱정이 없습니다. 아들자손이 많아서 빨갱이도 있고 국군도 있어요. 그러니까 당당하고 걱정 있는 겁니다.

생물학적 유전은 최소한 그 유전형질의 동일성이나 유사성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죠. 그러나 영혼은 어떻게 유전되는지 알 수 없고 입증할 방법도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영혼을 이야기할 때는 가정법을 써서 "만약에 영혼이란 것이 있다면"이라고 말합니다.

최재천 혼이라는 게 유전적으로 전승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지 많을까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지 않는 것만이 혼일 필요는 없죠.

…….

최재천 그럴 수 있다는 거죠.

도정일 ''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좋아요. 우리가 흔히 ''이라 부르는 것은 기독교에서 발하는 '영혼'과는 그 의미가 아주 다릅니다. 영혼이 영혼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해요. 육체와 분리될 수 있어야 하고, 육체와는 별개의 독자적인 존재방식을 가져야 하며 개개인에게 고유하고 단일한 '하나'여야 합니다. 이 영혼은 한 사람의 몸을 빌려서 잠시 거처하다가 몸이 쓰러지면 거기서 빠져나와 원래의 기원 지점으로 되돌아갑니다. 가틀 릭의 경우라면 영혼이 가는 곳은 천당 · 연옥 · 지옥 이 세 군데 가운데 하나죠. 그러니까 이 의미의 영혼은 DNA처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한 개체에서 다른 개체로 전해질 수 없죠. 사람의 영혼은 그 사람만의 것, 단일하고 고유한 것이니까요. 지옥에 떨어진 영혼이 "아이고, 지옥이란 데는 정말 지옥이야'라면서 어찌어찌 도망쳐서 다른 사람 몸으로 숨어들어 갈 수는 없죠. 천당에 간 영혼도 마찬가집니다. 천당이 아무리 지겨워도 영원히 그곳에 있어야 합니다.

플라톤의 경우는 조금 달라요. 한 영혼이 하늘로 갔다가도 다시 지상으로 떨어져 다른 몸을 쓰고 태어날 수 있다는 게 플라톤의 생각이었어요. 인도 신비주의 전통의 환생사상과 아주 닮은 데가 있죠. 그러나 이 영혼의 경우에도 최대 목표는 다시는 지상으로 환생하지 않는 겁니다. 몸뚱어리를 영원히 벗어던진 자유로운 혼이 되는 거죠. 플라톤식 '해탈'입니다.

최재천 저는 복제인간의 몸은 복제될 수 있어도 그 영혼은 복제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쌍둥이 형제가 완벽하게 동일한 유전자를 갖고 있어 모습은 거의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비슷해지지만 성격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까지 완벽하게 동일해지지는 않잖아요. 제 유전자가 저를 데리고 한 50년을 산 지금 이 시점에서 제가 저를 복제한다고 해도 그 친구가 저와 똑같은 성품을 지니고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할 리는 절대로 없다는 겁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영혼이란 육체보다는 분명히 정신과 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존재일 것 같은데, 유전자가 그 사람의 영혼을 처음부터 결정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육체와 정신이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다듬어지듯이 영혼도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은 경험과 성찰에 의해 다듬어질 것 같아요. 평생 품고 있다가 되돌려 줘야 하는 영혼을 하느님이 미리 정해서 점지해주는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한 인간의 영혼 역시 유전자와 환경의 합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어떤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서 어떤 삶을 살고 가느냐에 따라 내 영혼이 어떤 모습으로 나를 떠날 것인가가 결정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 당연히 나의 복제인간이라고 해서 나와 동일한 영혼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을 테고, 그렇게 엄연히 다른 또 하나의 영혼을 교회가 외면할 수는 없는 거죠.

우리 문화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이 빠져나간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 혼을 제대로 달래지 않으면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기 때문에 씻김굿 같은 걸 해서 망자의 혼을 달래곤 하지 않습니까? 이때 우리가 말하는 혼은 영혼과 다른 걸까요?

도정일 우리가 ''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신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구성물이에요. 문화적 구성물은 문화적으로 만들어지고 전승됩니다. 유전되는 거죠. 그러나 생물학적 유전이 아니라 문화적 유전입니다. 문화는 강력한 복제 메커니즘이에요. 한 세대나 집단, 혹은 개인의 정신이나 가치, 목표 같은 것들을 다음 세대로, 다른 집단이나 개체로 전승시켜 복제되게 하는 것이 문화의 큰 힘입니다. 앞에서 '문화적 DNA라고 부른 것이 바로그겁니다 '열의 정신을 이어받아' 어찌고저찌고할 때 그 '이어받는다'는 것이 바로 문화적 유전이죠. '민족혼'이랄 때의 혼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집단이 문화적으로 공유하는 혼입니다. 기억과 교육은 문화적 유전을 담당하는 대표적인 복제 메커니즘이죠. 문화적 유전은 의식적인 것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인 것일 수도 있다고 봐요. 이어받는다는 분명한 의식 없이도 우리는 문화가 전승시키는 것을 이어받고 또 다음 세대로 넘겨주거든요. 혼은 그렇게 문화의 통로를 거쳐 유전되는 거라고 지는 생각합니다. 생물학적으로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복제해 낸다 해도 그가 어디서 어떻게 성장하는가에 따라 그의 혼은 아주 다른 모습으로 구성될 수 있습니다 혼이 구성되는 거라면 바뀔 수도 있는 거죠.

…….

최재천 생물학자가 영혼을 DNA에 연결하려고 꿈틀거리고 있는데, 인문학자이신 도 선생님께서 영혼이 있다고 하시면 안 될 것 같은데요?

도정일 영혼 같은 건 있다고 말하면 문학은 참 황량해집니다. 홀랑 망할지도 몰라요 파우스트 이야기에서 독자를 섬뜩하게 하는 건 영혼을 팔아먹었다는 대목입니다. 디킨스의 㰡”크리스마스 캐럴㰡•에 나오는 유명한 노랑이 스크루지는 죽은 동료 말리의 영혼(망령)을 만나고 나서 착한 사람으로 바뀝니다. 사후세계를 상정하지 않는다면 㰡”신곡(神曲)㰡• 같은 기독교 문학의 걸작들도 난센스가 될지 몰라 그러나 문학이 영혼이니 망령이니 하는 것을 등장시킬 때는 그런 것이 실체로 꼭 존재한다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팔아먹을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죠. 팔아먹을 수 없고 팔아서도 안 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 때 인간은 제법 그럴듯한 존재가 되잖아요? 훨씬 덜 초라해 보이죠. 사람이 생전에 아무 짓이나 하면서 살아도 되는 것은 아니라는 윤리적 책임과 정의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 문학은 종종 사후세계를 등장시킵니다.

이렇게 보면 문학이 혼이니 망령이니 하는 것들을 등장시키는 것은 인간의 자기성찰, 반성, 객관화의 방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죽은 몸에서 빠져나온 혼이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한때는 자신의 것이었던 죽은 몸뚱이를 내려다본다. 문학에서는 이런 장면이 가능한데, 이건 성찰과 객관화의 아주 효과적인 장치죠. 유령이나 귀신, 원혼 등은 영혼과는 즘 다른 개념이지만 억울한 죽음, 이루지 못한 소망, 세상의 악행 같은 이야기들을 푸는 헤는 아주 제격이에요.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학은 유령과 망령, 원혼의 이야기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황석영 소설 㰡”손님㰡•은 한국전쟁 때 서로 죽이고 죽은 원혼들이 한참 세월이 지나 화해를 모색하는 이야기입니다. 고골리의 단편소설 외투는 현대 러시아 문학이 거기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작품입니다. 거기에도 평생 억눌리며 살다가 죽은 한 지방 관리의 망령이 등장합니다. 셰익스피어 비극 㰡”햄릿㰡•은 유령 출현 장면으로 시작되죠. 이 유령은 우리 식으로는 원혼입니다. 유령의 외출이란 기독교가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인데, 그 기독교 시대 한복판에서도 문학은 유령을 등장시킨 거예요. 유령들의 이야기를 듣지 많으면 인간은 기억상실에 빠집니다.

.....

도정일 시간 속에 태어나 살다가 그 시간의 밥이 되어 소멸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육체만 소멸하는 것이 아니죠. 한사람이 생전에 끼고 생각했던 모든 것 아름답고 슬픈 기억들, 경험과 지식, 사랑과 용기, 성공과 상실 등 이 모든 것이 죽음과 함께 소멸합니다. 식물학자 우장춘 박사가 타계했을 때 그 부인이 던졌다는 질문이 늘 생각나요. "이분이 가졌던 그 모든 훌륭한 지식이 이걸로 끝인가요?" 인간이 영혼을 생각해낼 것은 유한성에 대한 보복의 한 형식이라고 우선 말하고 싶습니다. 시간성을 초월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현실적으로는 충족 불가입니다 그러나 상상으로는 가능하죠. 이 관점에서 말하면 영혼은 시간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욕망의 산물이면서 그 욕망의 상상적 충족방식이 됩니다. 혹독한 소리 같지만, 죽음이라는 현실원칙 앞에서 인간이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고안해낸 일종의 자기기만(self-deception)이 영혼이라는 얘기가 되죠. 이 위대한 기만이 우리를 다독거리고 위로합니다. 264~9

도정일 최교수님께서 DNA라는 게 다음 세대의 형태나 행동 방식, 성향 자질 등을 생물학적으로 결정해 준다고 했죠. 그런데 만약에 영혼도 DNA, 전승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결국 그건 생물학적 결정론이 됩니다. DNA결정하는 거. 그러나 우리가 만약 영혼을 말한다면 그건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지 않고 남아있는 어떤 여백입니다. 복제할 수 없는 것, 미리 결정할 수 없는 것이죠. 사전에 결정되어 있지 않고 복제되지 않고 생물학적 복제의 방법으로는 전승할 수 없는 것, 그게 영혼입니다. 나는 여백을 좋아합니다.“(280)

도정일 ..."이 구라 속에 진실이 있다"는 말에 대한 믿음, "나는 마음만 먹으면 허위와 진실 양쪽을 모두 말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나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라는 주장에 대한 믿음이죠. 이 마지막 것이 아무래도 최고 걸작이 아닌가 싶어요. "나는 거짓말을 통해서만 진실을 말한다"는 소리기도 한데, 이건 문학만이 아니라 인간사 전반을 꿰뚫는 대단한 진실 같아요.“(289)

최재천 그런데 참 재미있는 역설이 있습니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세운 지극히 기독교적인 나라죠. 기독교 성서에 보면 인간이 소위 지식의 나무를 범한 것 때문에 낙원에서 겨난 거잖아요. 그런데 바로 그 신에 대한 반역이 서구 문화의 성공을 가져왔잖아요? 서구인들은 신에 대한 반역, 즉 지식에 대한 끈질긴 함구가 못된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걸 끔찍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신에게 도전해서 지식을 스스로 탐구하겠다고 해서 원죄가 되었는데, 그걸 속죄하라고 말하면서도 그것 때문에 성공한 거고, 그걸 절대로 안 놓친다. 이게 바로 기독교 문화인 것 같습니다. 인간 자유의지의 극대화가 오늘날 미국의 힘이고, 그게 오늘날 과학의 헤게모니를 가능케 했죠. 그때 이브가 그 열매를 따먹지 많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텐데 다행스럽게 따먹는 바람에 과학이 발전한 거죠. (하하하)

도정일 좋은 지적입니다 서구문명이 기독교 문명이라고들 하지만 그 안에는 그리스 전통이 섞여 있어요. 새뮤얼 헌팅턴 같은 사람은 서구 문명이 완전히 기독교 문명인 양 한 색깔로만 도배질을 하는데, 그건 위험하고 틀린 생각이에요. 지금 서구가 과학적 벽을 톡톡히 보고 있는 건 그리스 문화 덕분인 것 같습니다. 기독교 전통만 있었다면 서구는 지금의 이슬람처럼 과학 불모의 문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스 전통에서는 실용성 여부를 떠나 '진리 그 자체를 아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어요. 기하학이 그리스에서 발전한 것을 보세요. 측량 기술로 따지면 이집트가 훨씬 발전해 있었죠.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의 측량술을 들여다 추상기하학과 수학으로 바꿔 놓습니.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같은 사람들이 그래서 나은 거죠. 그리스 문화에서 최고 가치는 예술과 철학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용성을 떠난 것에 대한 그리스 문화의 애정을 지적한 것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최재천 그렇게 따지면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준 것도 마찬가지겠군요. 그리스 신화에서는 불이라는 도구를 신이 인간에게 준 걸로 설명한 반면에 기독교 쪽에서는 인간이 뭐 대단한 걸 바란 것도 아니고 알고자 하는 욕망 좀 가져 보겠다 한 걸 가지고 그렇게 야단쳐서 쫓아낸 걸로 설명하지 많습니까. 사실 자유의지를 즘 갖겠다고 생각한 건 엄청난 일이긴 하지만 말이죠.

도정일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대신 자유를 얻은 거죠 얻은 건지 훔쳐 나온 건지는 모르지만, 인간을 다시 에덴에 데려다 놔도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싶어요. 난 자유롭고 싶다면서 도망치는 거죠 그 자유 속에 '구라의 자유'가 들어 있습니다. (하하하)죽어도 거짓말을 하는 게 인간입니다. 죽어도 거짓말은 내놓을 수 없다는 거죠. 구라는 인간이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거짓말과 섹스, 이건 인간이 가진 두 가지 즐거움인 것 같아요.(364~5)

도정일 스티븐 핑커처럼 부모의 영향이론을 배격하는 경우를 보세요. 자라는 아이들에게 부모가 큰 영향을 준다는 소리는 틀렸으며, 후천적인 영향이 무엇이든 간에 아이들은 타고난 유전자대로 성장한다는 사회생물학의 주장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어 보입니다.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된다는 소리에도 그 나름의 진실이 있거든요.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과외를 시킨다고 오리가 백조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 오리는 오리로, 백조는 백조로 키우는 것이 현명하죠.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백조가 될 녀석도 시대와 환경을 잘못 만나면 백조는커녕 오리도 못 되는 수가 있습니다. 백조의 자질을 갖고 헤어난 사람도 독재정치에 걸리면 유전자를 퍼뜨릴 기회는커녕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어요. 정의니 평등이니 하는 사회적 조건이 중요한 건 그래서입니다.

진화론을 사회에 고스란히 적용하면, 자연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에서도 적응력이 떨어지는 개체들은 사라져야 마땅합니다. 게다가 부잣집에 태어나느냐 가난뱅이 집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적응력이 좌우될 때는 문제가 더 심각해지죠. 완전히 복권놀음이 되거나 과거처럼 귀족 신분사회로 퇴행하게 되는 겁니다. 복지정책을 가장 열심히 반대하는 사람들이 대개 진화론을 좋아하거든요. 사회라는 것은 정쟁 체제니까 능력을 가진 자만이 살아남는 것은 당연하다, 무능력자들까지 사회가 먹여 살리고 보듬어 안고 보호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죠. 적응력만으로 능력이 있다 없다를 판단하고 재단하는 것은 큰 폭력입니다.

내 생각에 자연에서의 진화와 사회적 진화가 함께 가는 부분도 있지만, 서로 역행하는 부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느 쪽을 문명의 발전 또는 사회 진화라고 부를 것인지, 최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재천 기본적으로 저희 사회생물학 쪽에서는 사회 진화와 생물 진화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무능력해서 자연 진화 상태라면 낙오되어 마땅한 사람을 사회 진화 상태에서는 모두 보호한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왜 자연 진화에서 나쁜 유전자가 깨끗이 없어지지 많고 항상 남아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요. 다시 말해서 자연 진화라고 해서 무능력한 유전자가 항상 낙오되기만 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우성인 대립 유전자와 열성인 대립 유전자를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 열성 유전자가 하나 있지만 표현형상으로는 항상 우성을 보여줍니다, 열성 유전자는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성 형질만 나타난 거죠. 색맹 유전자를 하나 가지고 있어도 색맹이 아니기 때문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지만, 만약 그런 사람 둘이 만나면 표현형으로도 색맹인 사람이 나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을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늘 존재하는 겁니다. 그게 생물 진화에요.

그러나 과연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복지정책들이 정말로 열성 유전자들을 지켜 주고 있는 것인지, 사실 한번쯤 짚어봐야 합니다. 꼭 우리가 지켜주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워요. 왜냐하면 우리가 판단하는 이른바 열성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 예를 들어서 그 사람의 유전자 전체에서 한 부분이 열성이라 해도 다른 부분은 상당히 우성적일 수도 있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열성적인 부분이 두드러지다 보니까 성공하지 못한 사람으로 보일 뿐이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 전체가 다 열등하다는 이야기는 분명히 아닐 겁니다. 그리고 그 열성 유전자 자체도 환경이 변하면 졸지에 우성 유전자로 대접받게 될지도 모르는 거니까요.(511~3)

도정일 ...아무리 투명성을 강조해도 인간의 가슴은 투명해지지 않아요. 한 자도 안 되는 가슴이 사실은 깊은 골짜기거든요. 그 가슴의 골짜기는 신도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어둡고 캄캄하고 깊어서 하느님의 눈으로도 그 안을 볼 수가 없어요. 신조차도 들여다 볼 수 없는 세계, 그게 내가 말하는 '두터운 세계'입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두터움, 심연이 필요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그런 심연을 가질 권리도 없다면 억울하죠... (559)

최재천 제가지금까지 했던 저술활동이 상당히 오해를 받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했던 말들은 사실 인간을 질타하고 동물로부터 배우자는 식은 아니거든요. 저는 인간과 등물을 비교만 했고 판단은 대체로 독자에게 맡겼습니다. 사실 우리가 웬만한 건 동물에게 배울 게 없어요. 대부분의 일에서 우리가 동물보다 잘하니까요. 그런데 기원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는 거죠. 기원을 설명하려면 등물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돌고래 사회에서도 서로 나누어 갖지 않으면 나쁜 놈이 되거든요. 어떤 성질 급한 돌고래 수컷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지 많고 새치기를 헤서 돌고래 암컷과 섹스를 하면 사회적 평판이 나빠져서 돌고래 사회에서 매장됩니다. 도덕성이라는 속성이 진화할 수 있는 조건이 동물 사회 안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거죠. 그러니까 인간적 윤리성의 기원을 찾을 때 동물행동학이 필요할 수 있죠.

새로운 삶을 위해 자연을 닮는답시고 요즘 우리 사회에 느림의 미학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엄청나게 잘 찰리지만, 가능할 것 같은 생각은 안 들어요. 그냥 동경하는 차원이지 실현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

최재천 저는 21세기의 새로운 인간상에 대한 강의를 많이 합니다. 20031월에 모리 전 일본총리의 초청을 받아서 일본에 갔다가 이런 강의를 했습니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이기도 하고 호모 폴리티쿠스이기도 하지만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즉 공생인간이기도 하다는 내용이었어요. 우리가 성공한 비결이 예전에는 호모 사피엔스, 즉 현명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라고 여겼죠. 우리가 잘나서 잘 살게 된 거라고 자화자찬해온 거죠. 그런데 피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인간이 똑똑한 건 사실이지만 현명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동물 중에서 가장 두뇌가 발달한 건 사실이지만, 지혜롭다는 생각은 안 든다는 겁니다. 우리가 진정 현명한 인간이었다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환경을 이처럼 망가뜨리며 살아오지는 말았어야죠. 현명하다는 자화자찬을 멈추고 앞으로 살아남기 취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농업혁명이라는 게 다른 말로 하면 공생이거든요. 자연에서 혼자 사는 식물들을 데려다 키워 주, 그 식물들이 공생을 통해서 굉장한 번식을 이룬 거죠. 공생 덕택에 우리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결국 우리가 자연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무기는 공생밖에는 없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합니다. 혼자서 살아남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멸망할 겁니다. 자연계 어디에도 다른 생물과 요즘 표현으로 자유무역협정, FTA를 맺지 않고도 살아남은 종은 없습니다. 한정된 자원을 가진 상태에서 경쟁은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이 무차별적 전투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다른 생물들과 동맹을 맺은 생물들이 더 잘 살아남았죠. 저는 우리 인간이 이번 세기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다시금 공생인간, 즉 호모 심비우스로 거듭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밀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완전히 새로 터득해야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했던 것을, 아주 훌륭하게 잘 했던 것을 되살리기만 하면 되니까요.

도정일 12시가 망하는 순간일 떼 현대인은 1159분까지, 그러니까 망하기 직전까지 방향을 바꾸지 많고 내달립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속도 조절의 모든 메커니즘이 정지되죠.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최 선생님의 공생의 철학, 참 좋습니다. 남미의 이반 일리치 같은 사람도 공생의 지혜와 철학을 끊임없이 이야기했어요. 일리치는 인간이 가진 대표적민 '공생의 도구'로 자전거, 도서관, 그리고 시()를 꼽았습니다. 그 양반, '대담(dialogue)은 안 꼽았을까? 생각해보면 공생의 도구는 참 많아요. 일리치가 세 개만 꼽은 것은 그냥 떼로 든 것이고 나머지는 당신들에 찾아보라는 의미겠죠?

그런데 인간은 회생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절망적인 순간에 도달할 때까지는 좀체 반성하지 많고, 더구나 반성의 결과를 사회 운영에 적용해서 필요한 변화를 일구어 내지 않습니다. 더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절정에 이르거나 죽음이 코앞에 보일 정도로 위기가 닥쳐야 그때서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지혜롭지 못한 거죠. 지금처럼 풍요의 맛을 본 시대에는 삶의 방식을 바꾸기가 더 어렵고 정치 민주주의 아래서는 국민을 설득하고 동의를 얻어야 하니까 본질적 변화를 시도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민주주의가 두터운 다양성을 위한 체제인데, 그것이 또한 다양성을 어렵게 하는 않은 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젭니다.

최재천 그런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게 있어요. 로버트 액설로드와 해밀턴 선생님이 함께 쓴 㰡”협동의 진화㰡•라는 책이죠. 그는 컴퓨터상에서 세계 여러 학자들과 게임을 벌였는데, 레퍼포트라는 캐나다 학자가 굉장히 단순한 '팃포텟' 게임 전략아로 가장 높은 점수를 땁니다. 팃포텟은 누구라도 우선 협동하기 시작하다가 배신을 당하면 그 때부터 협동을 멈추는 지극히 단순한 전략인데 그 단순한 프로그램이 복잡한 다른 모든 프로그램을 이기더라는 거죠.

해밀턴과 액설로드는 지극히 단순한 데서부터 협동이라는 것이 진화할 수 있다는 과정을 설명했어요. 인류의 싸움은 아마 친족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벌어졌을 거예요 카인과 아벨 이야기도 있잖아요. 처음에는 도저히 협동할 수 없었는데, 친족 간에 싸움을 많이 하는 집안보다는 서로 싸우지 많고 돕는 가족이 더 발전하는 예들이 많아지니까 차출 바뀌었다는 거죠. 자원이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싸우지 않고 공생을 결정한 친구들이 궁극적으로 더 성공한다는 겁니다. 지구에서 무게로 볼 때 가장 성공한 생물이 현화 식물이고, 숫자로 가장 성공한 생물이 곤충입니다. 두 생물이 서로 꽃가루받이를 통해 공생하고 협동하여 함께 큰 성공을 거둔 겁니다. '너 죽고 나 살자' 식으로 살아남은 생물보다 서로 돕고 산 생물들이 훨씬 더 잘 살아남았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놓고 보면 진화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진화의 최정점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우리는 지금 진화의 최정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화의 과정 중에 있죠. 생물 전체의 역사 중에서 인류가 태어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진화도 아주 초기 단계, 혹은 중간 단계에 불과한 거죠. 지금은 경쟁이 최고라고 믿지만, 이 단계를 넘어서서 끼리끼리 돕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우리가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도정일 그러니까 '경쟁을 넘어 협동으로'라는 단계군요. 한 시대의 구호가 될 만합니다. 제가 말한 두터운 세계와 최 선생님께서 말한 호모 심비우스의 세계가 같은 지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담 끝에 이르러 우리가 어떤 미래를 함께 그려볼 수 있게 된 것이 기쁘네요. 두터운 세계를 꿈꾸는 호모 심비우스, 자연과학과 인문이 충돌하는 지점도 이곳이고, 과학과 인문학이 손잡고 공생을 추구해야 할 지점도 이곳인 것 같습니다.(5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