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투리 시간을 빌려 읽으려다가 한 달이 되도록 2/3 밖에 읽지 못한 『한국단편문학선』(민음사)을 오늘 끝내려고 볕이 잘 드는 안방에서 종일 일삼아 읽어서 끝낼 수 있었다. 해방 전후 시기의 12명의 작가들의 단편 19편이 실려 있다. 오래 전에 읽었던 작품도 있는데 처음 대하는 작품 이상으로 새로운 맛이 울려난다.
“인생이 괴로움의 바다요, 불붙는 집이라면, 감옥은 그 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데다, 게다가 옥중에서 병까지 들어서 병감에 한정없이 뒹구는 것은 괴로움의 세 겹의 괴로움이다.”(100) 이광수의 「무명」에서
20년 전 쯤 KBS TV문학관에서 이광수의 「무명(無明)」을 극화했었는데 그 때 이 한 구절이 인상에 깊이 박혀 꼭 읽어 보고 싶었기에 이 책을 사게 되었다고 할만하다. 단편 소설은 인생의 단면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거라고 할 때 이 한 구절이야말로 핵심을 찔러 준 것이라고 하겠다.
흔히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하는데 우리가 사는 인생의 가장 큰 괴로움은 끊임없이 부딪치는 선택의 괴로움이라고 할 것 같다. 특히 정작 하고 싶은 선택을 하지 못하는 괴로움, 더욱이 양심에 반하는 선택을 해야 하는 괴로움일 것이다. 또 일상의 쳇바퀴를 잠시도 마음 편히 벗어날 수 없기에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산다고 하고 있으니 더할 나위가 없다. 그 속에서 병까지 들어서 겪는 괴로움까지 더하면 세 겹의 괴로움이 되는 것이다.
나야말로 세 겹의 괴로움 속에서 살아간다고 할 만한데 정작 괴로움이라는 걸 별로 못 느끼고 있으니 만성이기 때문일까? 현진건의 「빈처(貧妻)」처럼, 이상의 「날개」의 주인공들이 생활력이라곤 전혀 없이 아내에게 의존해 살아가는 것처럼 어머니께 의존해 살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어머니의 손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해 살아간다고 해야 정확할 것 같다.
빈처의 주인공은 나를 빼닮은 것처럼 책만 읽고 돈 안 되는 글만 쓰면서도 아내의 따뜻한 위로를 받으며 살아가니 말이다. 그래서 그 작품을 읽으면 아내가 시집 올 때 해 온 옷가지를 전당 잡혀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비참한 생활의 괴로움 속에서도 피어내는 진실한 사랑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
반면 날개의 주인공은 책도 안 읽고 잠만 자면서 소일하는 흐릿한 방을 예찬한다.
“나는 어디까지나 내 방이 - 집이 아니다. 집은 없다 - 마음에 들었다. 방 안의 기온은 내 체온을 위하여 쾌적하였고 방 안의 침침한 정도가 또한 내 안력을 위하여 쾌적하였다. 나는 내 방 이상의 서늘한 방도 또 따뜻한 방도 희망하지는 않는다. 이 이상으로 이 밝거나 이상으로 아늑한 방을 원하지 않았다. 내 방은 나 하나를 위하여 요만한 정도를 꾸준히 지키는 것 같아 늘 내 방이 감사하였고 나는 또 이런 방을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만 같아서 즐거웠다.(259)
이 정도면 철저한 현실 순응이요 도피주의라 할 만하다. 아내가 주는 출처를 알지 못하는(알려고도 않는) 용돈을 받아 모아서는 버리기도 하고 가끔 외출하기도 한다. 외출하다 일찍 돌아와 절대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보고 아내에게 죄지은 듯 무서워하기도 한다. 어느 날 외출했다가 갈 데가 없어 아내에게 돌아갈지 고민하다가, 이렇게 외친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번만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284) 이상의 「날개」
소설은 시대를 반영한다고 한다. 멀쩡한 사내들이 그렇게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식민지적 상황 속에서 자기 의지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을 상징하는 건지도 모른다. 날자는 것은 발을 디딜 터전이 없다는 절규인 것처럼. 지식인으로 최소한의 저항도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되어 버릴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이효석의 「산」은 이 단편들 중에서 이런 상황에서 특이한 탈출구를 보여 준다. 머슴을 살다가 주인에게 새경도 못 받고 쫓겨나 산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 산 생활의 묘사가 아름답다.
“눈에는 어느 결엔지 푸른 하늘이 물들었고 피부에는 산 냄새가 배었다. 바심할 때의 질북더기보다도 부드러운 나뭇잎 - 여러 자 깊이로 쌓이고 쌓인 깨금잎 가랑잎 떡갈잎의 부드러운 보료 - 속에 목을 파묻고 있으면 몸뚱어리가 마치 땅에서 솟아난 한 포기의 나무와도 같은 느낌이다 소나무, 참나무 총중의 한 대의 나무다. 두 발은 뿌리요, 두 팔은 가지다 살을 베이면 피 대신에 나무진이 흐를 듯하다. 잠자코 싫은 나무들의 주고받는 은근한 말을, 나뭇가지의 고갯짓하는 뜻을, 나뭇잎의 소곤거리는 속심을, 총중의 한 포기로서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해가 쪼일 때에 즐겨하고 바람 불 때 농탕치고 날 흐릴 때 얼굴을 찡그리는 나무들의 풍속과 비밀을 역력히 번역해 낼 수 있다. 몸은 한 포기의 나무다.”
산에서 나무를 하다 장에 팔아서 생활을 하면서 점찍었던 아가씨를 업어와서라도 살림을 차려야겠다고 꿈에 부푼다. 아무 것도 없는 그에게 아무도 없는 산은 해방 공간이자 유토피아였다. 그와 같이 식민지적 상황을 벗어났던 사람들도 상당히 있었을 것이고 지금도 산 생활이 좋아서 그와 같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가볍게 읽던 단편집 하나가 느려 터지기만한 내 머리와 손을 열심히 놀리게 만들게 해 주었으니 단편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은 무게를 지녔다고 할 수 있으리라!
20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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