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과 진경산수화풍

 

 

 

 

최완수의 [겸재 정선과 진경산수화풍]({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2},돌베개1998)을 읽다. 한 시대의 요구를 해결한 천재의 삶을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잘 그려냈다. 그의 가문, 스승, 교우 관계가 부럽게 만들어 준다.

 

영락해 가는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4대에 걸쳐 당대 최고의 명문 가문들과 혼사를 맺는 가격(家格)과 재산을 유지하며 상류층과 교류할 수 있어서 김창집 형제(六昌)를 스승으로 삼게 되어 평생의 후원을 받게 된다. 후원 세력이 정변(政變)에 휩쓸리고 집안의 가난으로 벼슬길을 포기하고 화도(畵道)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기(理氣)의 상호작용시 불변적 요소인 이가 기의 작용에 감응하여 변화한다는 "기발이 곧 이발"(氣發卽理發)이라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 주자 성리학이라면, 퇴계와 율곡을 거치면서 이기(理氣)의 상호작용시에도 이는 불변하고 기의 작용에 편승할 뿐이라고 하는(氣發理昇), (理通氣局:이는 만물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나 기는 一物에 국한하여 존재한다는 설)을 주장하여 만물의 성장이 기의 변화에 따라 결정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으로 성립시킨다.

이와 같이 조선 고유 사상인 조선 성리학 체계가 확립되자 이를 바탕으로 하여 율곡학파에서 문화 전반에 걸쳐 조선 고유색을 드러내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문학에서 정철이 한글 가사문학으로 국문학의 서막을 장식하고 최립은 독특한 문장 형식으로 조선 한문학의 선구를 이루었으며 석봉 한호는 조선 고유의 서체인 석봉체(石棒體)를 이루어 내었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그림에서도 조선 고유색을 드러내기 위해 진경 사생(眞景寫生)에 적합한 새로운 화법을 창안해 내야 했는데 이를 위해 능력있는 사대부 화가의 출현을 기다려야 했다.

율곡 세대이래 우리 산천에 고유한 아름다움을 그에 알맞는 화법으로 그려내는 진경산수화법의 창안이 숙제로 남아 있었다. 율곡 학파인 김창흡을 중심으로 한 백악 사단(詞壇)이 진경 시문을 대성해 내었으니 진경 화법을 창안해 낼 차례가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겸재 정선이 타고난 예술적 천품을 발휘하게 되었다.

 

정치적 격변 속에서 부침을 겪는 가운데 스승들의 지도 아래 화론(畵論)을 익히며 산천을 유람하며 사생을 한다.

"겸재 그림은 스승인 삼연 김창흡이 평한 대로 화흥이 절로 일어나 생동감이 흘러 넘치는 천취자성(天趣自成)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그림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이념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림을 왜 그렇게 그려야 하는가 하는 이유가 분명하니 항상 창조적이고 생동감이 넘쳐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북방화법의 특장을 자기화하였기에 골법이 최강(最剛)하게 되고 남방화법의 특장을 역시 충분히 소화해 내어 묵법이 가장 임리하게 되었는데, 이는 저들 중국의 남북화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소화해 내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 국토가 거의 대부분 바위 중에서도 가장 단단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우리 성정이 그런 화강암같이 굳센 암석기(岩石氣)를 가지고 있기에 겸재는 우리에게 되어 있는 그 본성을 최대한 노출시켰을 뿐이었고, 장마철의 습기찬 구름 산에서 남방화법의 임리한 미가운산법을 자기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끊임없는 자연 관조와 사생 및 임모 수련에서 대상의 형사(形似)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길러 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겸재를 전후한 중국 그림과 겸재 그림을 비교하면 겸재 그림이 화격(畵格)은 명나라 절파(浙派) 그림을 능가하고 골법은 명대 오파(吳派) 그림을 압도하며 형사는 거의 동시대의 청나라 양주 화파를 뛰어 넘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p95

 

숙종에서 정조까지 125년을 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眞景時代)라고 하고 있다. 사대로 받들던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를 적대시해 호란(胡亂)을 초래해 무력으로는 굴복 당했지만, 그의 정통성을 인정치 않고 우리에게 소중화(小中華)라는 문화적 정통성이 있음을 주장했다. 그 자부심에 의해 조선의 고유색을 시문(詩文)과 회화(繪畵)에 나타내기 시작함으로써 문화적으로 무르익은 황금기를 이루었다.

특히 정조가 남인(南人)과 노론(老論)이란 당쟁의 이념적 정쟁으로 약화되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준론(峻論) 탕평(蕩平)을 펴며 규장각에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젊은 학자들을 모아 친위 세력으로 길러 이상 정치를 폈다. 그의 때 이른 죽음으로 역사가 퇴보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이 시대를 공부를 할수록 그가 한 20년만 더 통치했었으면 우리 역사의 물줄기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