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이같이 영적 지배로서 육체적 억압 속에 지배하여 곧 내가 모든 것을 가지고 영혼을 위하여 더 좋게 만들 수 있고 죽음과 고난도 내게 섬기게 하고 유익하게 만들어 축복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높은 영광스런 품위요, 바르고 점진적으로 실현될 지배며 영적 왕국이다. 실로 내가 믿기만 하면 선이든 악이든 모든 것이 내게 선으로 봉사하지 않는 것이 없고, 나는 더 이상의 것이 필요로 하지 않고 내 신앙이 내게 충분하게 된다. 이것이 얼마나 값진 그리스도인의 자유요, 힘인가를 보라.
칼빈의 {기독교강요}에서
地上 감옥인 육체를 쓰고 있는 동안은 아무도 그것을 밀고 나갈 충분한 힘이나 충분한 열의가 없다. 신자의 대부분은 심히 약하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절름거리며 심지어 기어갈 뿐, 그 움직이는 속도가 아주 느리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자기의 미미한 능력의 한도에 따라서 전진할 생각으로 우리가 시작한 여행을 떠나도록 하자. 비록 짧은 거리일지라도 매일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그런 출발은 상서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길에서 다소라도 부단히 전진하도록 우리의 노력을 중단치 말아야 한다. 우리의 성공이 사소한 대가에도 낙심하지 말라. 원하는 데까지 미치지 못하더라도 어제보다 오늘이 나으면 무익한 노력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진실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우리의 목표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자기 만족에 빠지거나 자신의 악행을 변명하지 말고 종점을 향해서 계속 분투 노력하라. 우리의 목적은 선한 일에서 평소보다 조금씩 나아져 드디어 선 자체에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서 추구하고 따라가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연약을 벗어버리고 그 분과 완전한 친교에 들어가게 될 때에만 우리는 거기 도달하는 것이다. - {기독교강요} 中 p199.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을 따라 우리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우리 자신의 우리의 전소유를 잊어버리라...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지혜와 그의 뜻이 우리의 모든 행동을 주관하게 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그를 우리의 유일하고 합당한 목표로 삼고 생활의 모든 부분이 그를 향하여 경주하도록 하라. 자기가 자기 것이 아님을 배우고 자기 이성에서 지배권을 빼앗아 하나님께 드린 사람은 참으로 큰 유익을 얻는다!...그러므로 자기의 모든 능력을 바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자기를 떠나는 것 - 이것을 제일보로 삼으라.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뿐만 아니라, 모든 육적인 생각을 버린 빈 마음을 하나님의 영이 명하시는 쪽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사람)은 인생 행로를 이성에게만 맡긴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은 이성에게 성령에 양보하며 항복하며 복종하라고 명령한다. - 위의 책 p201.
(디도서 2:11-14에서) 근신은 정절과 절제 뿐 아니라, 세상 재물을 순결하고 검소하게 사용하며 빈곤을 참는 것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다. 의로움은 각 사람에게 그가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공정성의 모든 의무를 포함한다. 다음에, 경건은 세상의 불법에서 분리된 우리를 하나님과 결합시켜 참으로 거룩하게 만든다...참으로 그는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있는 우리 기업이 없어지지 않도록 이 세상을 나그네같이 살라고 가르친다. p204. 주께서 주시는 복을 받지 않고서 어떤 다른 방법으로 번영하겠다는 욕망이나 희망이나 계획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안심이나 확신을 품고 주께서 주시는 복에 몸을 맡기며 거기 안식을 얻으라...우리의 수완이나 노고도 주께서 도우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p211-2.
운명은 소경이며 사려 분별이 없기 때문에, 허물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에게 동시에 상처를 입힌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경건 생활의 입장은 선악간 운명을 정하고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뿐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은 무책임은 힘으로 경솔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행복과 불행을 가장 정연하고 공정하게 배정하신다고 믿는다. p214-5.
사람에 따라 건강 회복에 유익한 대로 여러 가지 방법을 쓰신다. 같은 병이라도 우리는 같은 정도로 앓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꼭 같은 거친 치료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이런 십자가로, 저 사람은 저런 십자가로 시련을 받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늘 의사께서는 어떤 사람은 부드럽게 치료하시고, 다른 사람은 거친 방법으로 깨끗이 하시지만, 모든 사람을 건강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며 아무도 그냥 버려두시지 않는다. 이는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병이 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p221.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人子가 되심으로써 우리가 그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고, 자신이 땅에 내려오심으로써 우리가 하늘로 올라갈 길을 준비하셨으며, 우리의- 죽을 생명을 가지심으로써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고, 우리의 무력함을 받으시고 그의 힘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셨으며, 우리의 빈곤을 받으시고 그의 풍부하심을 우리에게 넘겨주셨고, 또 우리를 우리의 죄의 짐을 스스로 지시고 그의 의를 우리에게 입혀 주셨다. - {기독교강요 下} p.441.
잔 귀용(1648-1717)의 [사랑의 역사]에서
사랑은 영혼의 몸짓이다. 그 몸짓으로 영혼이 만나는 대상들로 향하고, 그 대상들과 경험하고 몰두한다. 그 대상에게서 발견해 내는 완성을 위해서, 혹은 대상이 우리에게 야기시키는 즐거움을 위해서 어떤 대상에게 정신을 쏟을 수 있다. 그 대상의 탁월함은 우리 사랑을 완성으로 이끈다. 가당치 않은 이유로 우리가 그를 탐낼 때 그 대상은 더욱 더 완전하고, 우리의 사랑은 더욱 더 불완전한 것이다. 그가 나에게 즐거움의 원인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신을 사랑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내가 그를 지향하고, 그에게 몰두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를 지향하고, 그에게 몰두되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일 뿐이다. 진실한 사랑이란, 반대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귀하신 분에게 돌려 드리는 정의이다. 사랑의 본능은 자기로부터 나오고, 자신을 잊어버리고, 사랑 받는 대상을 위해 희생하고, 그가 바라는 것만을 원하고, 그의 행복 속에서 우리의 행복을 찾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사랑의 본질과 전혀 관계되지 않는 재난일 뿐이다.
에리히 프롬의 [희망의 모호함에 관하여]에서
합리적 신념은 합리적 절망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존에 관련된 온갖 요인에 관한 가장 완전하고 비판적인 지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인간에 대한 합리적 신념의 근거는 그의 구원의 현실적 가능성의 존재이다. 합리적 절망의 근거는 이와 같은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식일 것이다...대다수의 사람들은 인간이 향상(向上)한다는 신념을 비현실적이라 하여 간단하게 비난해 버린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도 종종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신념이란 현실적인 가능성의 한계 내에서 행동하는 것이지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도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날마다 메시아의 도래(到來)를 기대하지만, 메시아가 약속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하지 않는 역설적인 희망이다. 이 희망은 수동적이거나 인종적이기보다 오히려 실질적 가능성의 영역 내에서 행위의 모든 가능성을 추구하는 끊임없는, 그리고 능동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 자신의 성장과 해방에 관한 한 결코 수동적일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