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의 시 모음
■ 나그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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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찬(素饌)
오늘 나의 밥상에는 냉이국 한 그릇
풋나물무침에 신태(新苔) 미나리김치 투박한 보시기에 끓는 장찌개
실보다 가는 목숨이 타고난 복록(福祿)을 가난한 자의 성찬(盛饌)을 묵도(默禱)를 드리고 젓가락을 잡으니 혀에 그득한 자연의 쓰고도 향깃한 것이여 경건한 봄의 말씀의 맛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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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이 날 에워싸고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짧은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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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월의 노래
목련 꽃 그늘 아래에서 베르테르의 편지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횃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에게 주어라.
목련 꽃 그늘 아래에서 긴 사연의 편지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 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횃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에게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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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 반 (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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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관
관(棺)을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알아보고 형(兄)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쓰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하고 소리가 들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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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리막길의 기도
오르막길이 숨 차듯 내리막길도 힘에 겹다. 오르막길의 기도를 들어주시듯 내리막길의 기도도 들어 주옵소서.
열매를 따낸 비탈진 사과밭을 내려오며 되돌아보는 하늘의 푸르름을 뉘우치지 말게 하옵소서.
마음의 심지에 물린 불빛이 그것으로 초밤길을 밝히게 하옵시고
오늘은 오늘로써 충만한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어질게 하옵소서.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육신의 눈이 어두워질수록 안으로 환하게 눈 뜨게 하옵소서.
성신이 제 마음 속에 역사하게 하옵소서.
下旬의 겨울도 기우는 날씨가 아무리 설레이어도 항상 평온하게 하옵소서.
내리막길이 힘에 겨울수록 한 자욱마다 全力을 다하는 그것이 되게 하옵소서. 빌수록 차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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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안 (開眼)
나이 60에 겨우 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神이 지으신 오묘한 그것을 그것으로 볼 수 있는 흐리지 않은 눈
어설픈 나의 주관적인 감정으로 채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꽃 불꽃을 불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하다. 神이 지으신 있는 그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 至福한 눈
이제 내가 무엇을 노래하랴. 神의 옆자리로 살며시 다가가 아름답습니다. 감탄할 뿐 神이 빚은 술잔에 축배의 술을 따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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