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양희 시 모음

 

 

 

 

■ 저 모습

 

하루를 살다 죽는 하루살이는

하루를 살기 위해

천일을 물 속에서 보낸다

스무 번도 넘게 허물을 벗는다

하루를 살기 위해

 

일주일을 살다 죽는 반딧불은

일주일을 살기 위해

수컷을 유혹해 알을 갖는다

꽁지에 불을 뿜고 날아다닌다

일주일을 살기 위해

 

허물도 벗지 않고

불도 뿜지 않고

오십 년도 넘게

잘도 사는 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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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새가 사는 법

 

벌새는 1초에 90번이나

제 몸을 쳐서

공중에 부동자세로 서고

파도는 하루에 70만번이나

제 몸을 쳐서 소리를 낸다

 

나는 하루에 몇번이나

내 몸을 쳐서 시를 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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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지(破紙)

 

그 옛날 추사(秋史)는

불광(佛光)이라는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버린 파지가 벽장에 가득했다는데

시(詩) 한 자 쓰기 위해

파지 몇 장 겨우 버리면서

힘들어 못 쓰겠다고 증얼거린다

파지를 버릴 때마다

찢어지는 건 가슴이다

찢긴 오기가

버려진 파지를 버티게 한다

파지의 폐허를 나는 난민처럼 지나왔다

고지에 오르듯 원고지에 매달리다

어느 땐 파지를 팔지로 잘못 읽는다

파지는 나날이 내게서 멀어져간다

내 손은 시마(詩魔)를 잡기보다

시류와 쉽게 손잡는 것을 아닐까

파지의 늪을 헤매다가

기진맥진하면 걸어나온다

누구도 저 길 돌아가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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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

 

좋은 일이 없는 것이 불행한 게 아니라

나쁜 일이 없는 것이 다행한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이나 원망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더러워진 발은 깨끗이 씻을 수 있지만

더러워지면 안 될 것은 정신인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에 투털대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자기 하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은

실상의 빛을 가려버리는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에 발길질이나 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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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편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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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수수밭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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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가에서의 하루

 

하늘 한쪽이 수면에 비친다

물총새가 물속을 들여다 보고

소금쟁이 몇개 여울을 만든다

내가 세상에 와 첫눈을 뜰 때

나는 무엇을 보았을까

하늘 보다는 나는 새를 물보다는

물 건너가는 바람을 보았기를 바란다

나는 또 논둑길 너머 잡목숲

숲아래 너른 들판을 보았기를 바란다

부산한 삶이 거기서 시작되면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바라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산그늘이 물속까지 따라온다

일렁이는 물결속 청둥오리들 나보다도 더 오래 물위를 헤맨다

너는 아는구나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 물이라는 걸 아는 구나

오늘따라 새들의 날갯짓이 훤히 보인다

작은 잡새라도 하늘에다 커다란 원을 그리고

낮게 내려갔다 다시 솟아 오른다 비상!

절망할때마다

우린 비상을 꿈꾸었지 날개가 있다면 ......날 수만 있다면........

날개는 언제나 나는 자의 것이다 뱃전에 기대어 날지 않는 거위를

생각한다 거위의 날개를 생각한다 물은 왜 고이면 썩고 거위는

왜 새이면서 날지 않는가 해가 지니 물소리도 깊어진다 살아있는

것들의 모든 속삭임이 물이 되어 흐른다면..... .물소리여

너는 세상에 대해

무엇이라 대답할까 또 소리칠까 소리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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