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의 시 모음, 담쟁이 外

 

 

 

 

■  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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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허 이 후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

모든 것이 불타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

화산재에 덮이고 용암에 녹은 산기슭에도

살아서 재를 털며 돌아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돌무더기에 덮여 메말라버린 골짜기에

다시 물이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어 흘러간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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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래기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

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

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

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

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가장 오래 세찬 바람 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

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

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

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키어 온 저들을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

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

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우기 위해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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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기

 

새 한 마리 젖으며 먼 길을 간다

하늘에서 땅끝까지 적시며 비는 내리고

소리내어 울진 않았으나

우리도 많은 날 피할 길 없는 빗줄기에 젖으며

남 모르는 험한 길을 많이도 지나왔다

하늘은 언제든 비가 되어 적실 듯 무거웠고

세상은 우리를 버려둔 채 낮밤없이 흘러갔다

살다보면 배지구름 걷히고 하늘 개는 날 있으리라

그런 날 늘 크게 믿으며 여기까지 왔다

새 한 마리 비를 뚫고 말없이 하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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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가는 길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뿐이다

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

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다

두려워 마라 두려워하였지만

많은 이들이 결국 이 길을 갔다.

죽음에 이르는 길조차도

자기 전 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

순탄하기만 한 길은 길 아니다

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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