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의 시 모움

 

 

■ 이 순간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 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 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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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월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신록을 바라다 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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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밖은 오월인데

 

창밖은 오월인데

너는 미적분을 풀고 있다

그림을 그리기에도 아까운 순간

 

라일락 향기 짙어 가는데

너는 아직 모르나 보다

잎사귀 모양이 심장인 것을

 

크리스탈 같은 미(美)라 하지만

정열보다 높은 기쁨이라 하지만

수학은 아무래도 수녀원장

 

가시에도 장미 피어나는데

'컴퓨터'는 미소가 없다

마리도 너도 고행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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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

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동안

앉아 있다가

깃털 하나 아이 떨구고

아득한 눈속으로

사라져 가는

너